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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속경쟁과 「전용차선제」/박완서칼럼(화요세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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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속경쟁과 「전용차선제」/박완서칼럼(화요세평)

입력
1994.09.2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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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국토의 주차장화, 전국토의 묘지화라는 말이 추석명절처럼 실감날 때도 없을 것이다. 그 느낌은 거의 공포에 가깝다. 도시생활을 오래 한 사람치고 조상의 묘를 한 군데 모신 이는 거의 없다. 물려받은 선산이 있는 행복한 후손도 국토개발등으로 언제까지나 선산을 유지할 수 있을 것같지 않은 예감때문에, 또는 원거리 성묘의 불편등을 이유로 증조나 고조의 묘가 있는 선산을 놓아두고 조부모나 부모의 묘는 근교의 공원묘지에 모신 경우가 허다하다. 공원묘지도 단시일내에 그 수용능력이 한계에 다다르기 때문에 조부모와 부모의 묘가 각각인 경우 또한 적지 않다. 생존해 계신 부모가 기다리는 고향이 없는 후손도 이렇게 바쁜데 부모나 큰댁이 고향을 지키고 있으면 연휴 나흘도 모자라 그전, 전전 일요일까지 포함을 시켜 머리를 잘 굴려 적절히 안배하지 않으면 낭패를 보게 된다. 각자 신발 한 켤레 꿰차는 것만치나 쉽게 집집마다 한두대씩 보유한 차들이 지척을 천리로 만들어 버리기 때문이다. 휴일이 차라리 하루나 이틀이었으면 의무를 소홀히 할 수 있는 핑계라도 되련만 하는 생각까지 들 지경이다. 특히 주부들은 시댁에 대한 의무와 병행할 수 없는 친정에 대한 애정때문에 갈등을 겪으랴, 물가고에 시달리랴, 성묘갈 때마다 음식장만하고 추석날은 추석날대로 차례를 지내야 하는 몇중의 명절을 쇠랴, 지칠대로 지치기 마련이다. 「한가위엔 가난한 집 며느리 뱃덧이 난다」는 속담도 있듯이 추수의 기쁨을 우선 조상에 고하고 나서 이웃과 나누며 즐기던 유연하고 풍요한 명절풍경은 간 데 없고 전쟁을 방불케 하는 치열한 귀향과 성묘의 다툼과, 상인들이 만들어낸 거짓 풍요가 있을 뿐이다. 이런 사정이 해마다 더 나빠지는 걸 보면서 아무리 미풍양속이라 해도 농경사회에서 유효하던 게 아무런 수정없이 산업사회에서도 통용되기엔 무리가 많다는 생각을 안할 수가 없다.

 그런 중에도 이번 추석에는 딴 해에는 볼 수 없었던 희망적 변화를 볼 수가 있었는데 그건 버스 전용차선제였다. TV 화면으로 본 그 광경은 아름답고 감동적이기조차 했다. 그러나 같은 날, 같은 화면으로 우리는 지존파의 이를 가는 모습과 그들이 하늘 무서운 짓을 저지른 아지트를 보지 않으면 안되었다. 전혀 원한관계가 없는 이를 단지 그랜저를 탔다는 이유로, 또는 연습삼아 죽인 것도 끔찍한 일이었지만 그 시체처리 방법에 이르러서는 할 말을 잃게 된다.

 그 후 하루도 지존파의 얼굴을 보고 듣지 않은 날이 없으니 만나는 사람끼리도 자연히 그 일을 화제삼게 된다. 처음에는 추석음식을 다 토할 뻔 했다는 비위 약한 사람도 있더니만 날이 갈수록 엽기적인 연속극 얘기를 할 때처럼 흥미위주로 돼가는 것같다. 그렇다고 사설화장장을 보고 토할 뻔한 약한 비위가 곧 도덕적인 순결을 의미하는 건 아닐 것이다. 부의 축적과정이 의심스러운 부유층이나, 도대체 부를 축적하고 말 새가 있을 것같지 않은 새파란 젊은이의 헤픈 씀씀이를 보면서 저 꼴만 안 보았으면 한결 살 맛이 나련만 하는 생각을 안해본 사람이 누가 있을까. 부를 죄악시말아야 한다는 소리엔 동의하지만 그건 정당한 부에 한한 얘기다. 또 아무리 노력해서 번 돈이라 해도 사치와 유흥으로 부를 과시한다든가 자식사랑을 돈으로 처바르는 짓은 그 사회적인 해악을 생각해서라도 죄악시해야 한다. 지존파들은 소위 야타족이니 오렌지족이니 하는 씀씀이 헤픈 족속을 이를 갈고 미워하는 것같지만 실은 선망했기 때문에 닮아보려고 그런 짓을 한 것이지 결코 죄악시한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단지 그랜저를 탔다는 이유로 부자로 지목한 이들은 서민층 아니면 건실한 중산층이었다. 여기서 우리는 매스컴이나 코미디가 경박하고 무책임하고 과장되게 남용하는 야타족이니 오렌지족이니 하는 유행어가 어느 틈에 우리에게 강요해온 몰아붙이기식 사고의 폐해를 보게 된다. 그들이 미워한 어떤 동네만 해도 그렇다. 보통사람치고 그 동네에 역시 보통으로 건실하게 사는 친지를 안 가진 이는 거의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동네를 부를 때는 단순한 지명이상의 몰아붙이기식 난폭한 연상작용이 일어나게 된다. 유행어가 존재를 만들어 낼지도 모른다고 생각할 때 앞으로 지존파라는 유행어가 생겨나는 것은 어떻게든지 막아야 되지 않을까.

 우리는 내 남없이 고도성장의 가도를 숨가쁘게 달려왔다. 행여나 중산층의 대열에서라도 낙오할까봐 고속도로를 달릴 때처럼 잘 빠질 때는 최고 속도를 놓고 밀릴 때는 수단껏 끼여 들고, 대가리를 처박고, 갓길로 빠지고, 우회도로를 찾고 빵빵대고 으르렁거리느라 그 경쟁에서 멀찌감치 밀려난 이들이나 고속도로로 진입할 수 있는 수단을 처음부터 갖지 못한 이들의 소외감과 적개심을 미처 헤아리지 못했다. 마냥 적체된 그들의 울분이 독기가 되어 터져나온 게 지존파의 행태가 아니었을까. 우리 모두 우리의 속도를 늦추거나 비켜서서 그들도 같이 가거나 먼저 보낼 수 있는 전용차선을 마련해줘야 한다. 더 늦기 전에.<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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