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대화/71년 적십자회담 물꼬… 밀사접촉까지/처음엔 북적극적… 80년대이후 남주도/통일의 그날까지 대화지속이 양측 모두의 역사적 책임 『분단 4반세기만에 처음으로 동포가 한 자리에 모였는데 서로 대좌해서야 되겠습니까』 71년 9월20일 상오11시 판문점 중립국감독위원회 회의실. 남북적십자 예비회담 첫 회의는 북측 대표단의 이런 제안으로 시작됐다. 양측 대표단은 북측이 준비해 놓은 「잔칫상」으로 자리를 옮겨 서로 섞여 앉은 뒤 어색함을 없애려는 듯 환담을 주고 받았다. 말로만 듣던 「룡성맥주」를 가득채운 글라스가 서로 부딪치며 경쾌한 소리를 냈다. 첫 만남의 축배였다고나 할까…. 그러나 5명의 남측 대표단은 극도로 긴장하고 있었다. 그해 8월12일 최두선 당시 대한적십자사총재는 특별성명을 통해 분단 이후 처음으로 이산가족 재회를 위한 남북대화를 제의했고 북은 이틀만에 이를 즉각 수용했었다. 당시 국내외 정세는 긴박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중국대륙의 공산화에 이어 인도차이나반도마저 붉은 깃발로 뒤덮였고 한반도의 상황은 북이 군사력이나 경제력등 모든 국력에서 남을 앞지르고 있는 추세였다.
박정희정권은 어떻게든 전쟁위기를 막고 국력회복을 위한 시간을 벌어야 한다는 수세적 입장이었고 북쪽의 「위대한 수령」은 다소 우월감에 젖어 적극적이고 공세적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남북대화 24년의 대장정이 시작된 것이다.
『우리는 이런 순간이 오기를 예상하고 10년전부터 준비해 왔습니다』 북측 대표단중 누군가가 불쑥 이렇게 내뱉었다. 모든 것이 생소했고 미처 준비도 부족했던 남측 대표단은 등골이 오싹해지기까지 했다. 회담 직전 박대통령이 극비리에 내린 두 가지 의제, 즉 판문점연락사무소 설치와 연락사무소간 직통전화 개설문제를 어떤 형식으로 전달해 합의시켜야 할지 고민이었다. 대표단은 이 자리에서 끝내 공식제안을 하지 못하고 말았다. 하지만 일행중 누군가가 옆 자리의 북측대표에게 이 말을 했고 그 결과는 이틀 뒤 북한이 먼저 이 문제들을 들고 나와 당일로 남측의 회담목표가 달성돼버렸다.
그러나 예비회담은 북측이 이산가족의 범위에 「친우」까지 포함시키자고 주장하는등 서서히 정치공세를 펴는 바람에 이듬해 8월까지 25차까지나 계속되는 답보상태에 빠졌다. 9차 회담이 진행될 무렵인 71년 11월 이후락 당시 중앙정보부장은 내친김에 정치회담까지 성사시켜 보자는 욕심으로 정홍진 당시 예비회담 3석 대표를 통해 본격적인 밀사접촉을 시도했다. 정대표는 회담도중 마주앉은 북측의 2석 대표 김덕현에게 「따로 조용히 얘기하자」는 메모를 건넸고 이어 72년 3월 평양을 방문, 『이후락부장이 김영주 조직지도부장과 만나고싶어 한다』는 훈령까지 전했다. 이에 따라 이후락―김영주의 평양회담 및 이―박성철의 서울회담이 극비리에 성사됐고 역사적인 「7·4남북공동성명」이 발표됐다.
72년 11월 남북조절위가 구성돼 서울과 평양을 오가며 3차례 본회담을 가졌으나 73년 8월28일 평양방송은 「중대방송」을 통해 김영주명의로 일방적으로 조절위원회 파기를 선언했고 이와 함께 7차까지 진행중이던 적십자본회담마저 중단돼 한동안 남북대화는 단절돼버렸다. 크게 보면 제1기 남북대화가 막을 내린 것이다. 당시 수십 차례의 남북대화는 처음부터 남과 북이 서로 「동상이몽」으로 출발했다. 김일성은 5년 후 쯤 『이후락과 박정희에게 속았다』고 공언한 것으로 알려지기도 했다.
이처럼 중단됐던 남북대화는 10여년간의 단절기를 거쳐 80년대 중반부터 제2기로 접어든다. 이때도 북한은 아웅산테러로 인해 실추된 국제이미지를 만회하기 위해, 남한은 12·12사태, 광주민주화운동등을 거친 후 정통성시비를 극복하기 위해 서로의 이해가 맞아떨어졌다는 분석도 있다. 84년 북한은 느닷없이 남한에 수해물자를 제공하겠다는 뜻을 비췄고 전두환대통령이 이를 전격 수용한 것이 중요한 계기가 됐다. 이 시기에 적십자회담 3회, 경제회담 5회, 국회회담예비접촉 2회, LA올림픽 단일팀구성을 위한 체육회담 3회등 수십 차례의 회담이 진행됐다. 특히 85년 9월20일부터 4일동안 서울과 평양에서 이뤄진 이산가족 고향방문단및 예술공연단 교환공연은 남북분단 이후 최초의 민간차원의 인적교류 성사라는 중요한 기록을 남겼다.
2기 때부터 남한의 급속한 경제발전으로 남북의 국력이 뒤바뀌어버린 형국은 90년대의 3기 때부터는 더 더욱 심화됐다. 특히 동구권몰락과 한소, 한중수교등은 북한에 엄청난 충격을 안겨 주었고 남한은 우월감과 자신감을 바탕으로 대화를 주도해 나가기 시작했다. 축구 교환경기, 탁구·축구 단일팀구성, 예술교류행사, 쌀직교역등이 성사되기에 이르렀다. 특히 남북고위급회담이 서울과 평양을 번갈아가며 8차례 진행됐고 이 과정에서 역사적인 「남북기본합의서」가 채택됐으며 UN동시가입도 이루어졌다. 성사는 안됐지만 남북정상회담 합의도 이끌어냈다.
이처럼 분단 후 26년만에 시작된 남북대화는 10여년의 단절기(1기↓2기)를 거쳐 다시 3년여만에(2기↓3기) 재개된 셈이며 그후 단절기는 1년을 넘기지 않고 있다. 즉 대화와 대립을 잇는 사이클의 폭이 점점 줄어들고 있는 것이다. 「남북기본합의서」의 발효에 따라 앞으로 5개 공동위원회를 본격 가동시키는등 통일의 그날까지 남북대화가 단절없이 지속되도록 하는 것이 남북한 모두의 역사적 책임으로 남게됐다.
남북간에는 때때로 밀사를 통한 물밑대화가 이루어지기도 했다. 3공 때 이후락―김영주·박성철의 첫 만남 역시 밀사형식이었고 5공 때의 장세동씨나 6공 때의 박철언·서동권씨등도 밀사로 평양을 다녀온 사실이 이미 여러 경로를 통해 간접 확인되기도 했다. 이같은 밀사접촉은 오히려 「허심탄회」하게 서로의 입장들을 절충할 수 있는 효과를 본 측면도 있다. 예컨대 평양을 몰래 방문해 김일성·김정일부자를 함께 만났던 6공 때의 한 인사는 당시 남북정상회담을 제의하자 김일성이 이를 반대했으나 옆에 있던 김정일이 불쑥 끼여들며 『그 정도는 한번 성사시켜도 되는 것 아닙니까』라고 반문했었다는 일화가 전해지기도 했다.【홍윤오기자】
◎남북회담사무국/통일원 산하 대북창구 역할 “야전사령부”/상대방의 성격·특징서 대화술까지 교육
통일원 산하 남북회담사무국(국장 정시성)은 남북대화 24년을 최일선에서 이끌어온 야전사령부다. 대화전략을 짜고 북측과 전화통지문을 주고 받는등 대북창구 역할을 맡아 남북대화의 온갖 궂은 일을 도맡아 하고 있다. 대화직전에는 우리측 대표들에게 상대방 대표의 특징과 화술등을 주지시키며 구체적인 화술까지 교육시키기도 한다.
감사원에 인접한 서울 종로구 와룡동에 위치한 남북회담사무국은 71년 6월과 9월에 각각 발족한 중앙정보부 협의사무국과 대한적십자사(한적)사무국을 모체로 출발했다. 임시기구였던 협의사무국은 72년8월 협의조정국으로 개편됐고 협의조정국은 다시 73년 5월 한적사무국을 흡수·통합한 뒤 협의국으로 운용돼 왔다. 80년 10월 협의국이 통일원으로 넘어오면서 명칭은 남북대화사무국으로 바뀌었고 92년 10월 다시 남북회담사무국으로 개칭돼 오늘에 이르고 있다. 처음에는 직원들 대부분이 「중정요원」들로 업무가 지나치게 폐쇄적이고 경직돼있다는 평을 받기도 했지만 지금은 반수 이상이 통일원 출신들로 물갈이가 됐으며 24년간 남북대화를 이끌어오는 동안 상당히 유연해진 모습을 보이고 있다.
지난 1일로 창설 23주년을 맞은 회담사무국은 이제 기구확대등 시대에 부응하기 위한 변화를 시도하고 있다. 회담사무국장을 차관급으로 격상시켜야 한다든지 기획과의 규모와 인원을 확대해 보려는 시도가 그것.
현재 당정협의중인 이 안이 대통령의 최종 재가를 얻어 낼지는 아직 미지수지만 회담사무국으로서는 앞으로 본격적인 「대화러시」가 발생할 것에 대비해 반드시 관철 됐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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