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존이라니…. 지존파 일당들의 반인륜·반사회적 작태에 놀란 사람들은 지존이란 말뜻의 외경스러움을 떠올리며 또한번 혀를 찼다. 지존이란 사전적 정의로는「더 할 수 없이 존귀함」, 즉 임금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들이 이런 사전적 어의를 알고 조직이름에 이 말을 붙였는지 따져보기도 무모할 만큼 그들의 행동은 끔찍했다. 홍콩폭력영화의 영향이라 하지만 자기들 두목을 그렇게 섬기겠다고 그런 이름을 붙였다면 무고한 피해자들을 서캐잡듯 해버린 그들의 만행은 어떤 말로도 설명될 수 없으리라.
○무고한 피해자들
자기들만 못 배우고 가난하다는 이유로 가진 사람들을 극도로 증오하고 적대시하는 사고방식과 생리에도 분명히 문제는 있다. 어이없는 그들의 반사회성에 전율하면서도 그들의 토막난 말들을 음미해보게 되는 것은 배금사상과 황금만능풍조에 병든 우리 사회를 한번쯤 돌아보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들은 야타족 오렌지족을 죽이지 못하고 붙잡힌 것이 한이라고 했다. 만일 붙잡히지 않았으면 고급백화점 고액구매객들과 남한강변 러브호텔들을 싹쓸어버릴 계획이었다고 말했다. 범인 가운데 한명은 경찰에서 신문받을 때 얻어 먹은 7천원짜리 저녁식사가 지금까지 먹어본 것 가운데 가장 맛있는 음식이었다고 말했다. 7천원짜리 밥을 처음 먹어본 사람들이 가진 자를 향해 독을 품고 말하려는 몸부림을 못본체 할 수 없음은 왜일까. 그들의 말 속에 우리에게 많은 것을 일깨워 주는 메시지가 들어있는 것은 아닐까. 국민소득 7천달러 수준인 우리나라가 하루 빨리 흥청망청하는 잔치판의 미망에서 깨어나야 한다는 것을 대변해준 교훈은 아닐까.
○끝도없는 과소비
지존파 일당들이 압구정동 야타족과 오렌지족을 왜 그토록 증오했는지 곰곰이 되씹어 볼 일이다. 부모가 사준 고급승용차를 몰고나가 사우나에서 느긋이 전날 밤 늦게까지 즐긴 피로를 풀고 밤이면 수십만원짜리 업소에서 고급 술과 음식을 즐기면서도 주머니 사정과 타협할 필요가 없는 젊은이들. 그렇게 놀고 나서 차를 세우고 길가는 젊은 여자에게 『야, 타!』하면 만사형통이라는 「야타족」들이 같은 또래인 범인들에게 어떻게 비쳐졌을지 상상하기 어렵지 않다. 아파트단지 쓰레기통에 넘쳐나는 추석선물 포장지더미, 불경기 때에도 변함없이 붐비는 룸살롱, 서슬퍼런 사정바람 속에서도 부킹이 어렵다는 골프장, 한국방문의 해가 무색한 해외여행 붐…. 우리의 과소비·향락풍조는 끝도 한도 없어 보인다.
서울의 웬만한 대학은 지하철역과 인접해 있고 버스노선은 사통팔달이다. 그런데도 학교마다 수백수천의 학생들이 승용차를 몰고 다니며 학내 주차질서를 어지럽히는 것은 안락과 편의만을 추구하는 병든 가치관의 소산이 아닐까.
우리 민족은 본시 가난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대다수 민중은 기본적인 의식주 해결에 늘 쫓기며 살아왔다. 가난이 미덕은 아니지만 좀 불편할 뿐 부끄러움은 아니라고 여기며 살아온 것이 바로 십수년 전까지 우리 생활의 진솔한 모습이 아니었던가. 청빈의 사상, 가난할지언정 지조와 기개를 꺾는 일을 부끄러워한 선비정신을 숭상하는 것이 우리의 전통이었다.
○공동체의식 절실
우리는 잘못된 샴페인축제에 들떠있다. 이웃나라 부자들이 아직 한국은 샴페인을 즐길 때가 아니라고 비웃는데도 우리는 그 소리를 듣지 못하고 있다. 아니 듣고도 그렇지 않다고 우기면서 축제의 잔을 놓으려 하지 않는다. 국민소득이 겨우 7천달러 수준인 우리의 잔칫상은 일본이나 구미선진국들이 놀랄 정도로 호화롭다. 아직은 좀 더 아껴야 할 때다.
까닭없이 가진 사람들을 저주하는 지존파의 사고방식은 우리 모두를 불안에 떨게 했지만 그들이 왜 그런 생각을 갖게 됐는지, 그리고 함께 사는 공동체의식의 필요성도 한번쯤 생각해 봐야 할 때가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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