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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석과 어머니/이호철 작가(한가위 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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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석과 어머니/이호철 작가(한가위 기고)

입력
1994.09.1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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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월 단오절 무렵을 흔히 「계절의 여왕」이라고들 하지만 나는 우리나라 4계절 중에서 추석무렵을 가장 좋아한다. 7,8월의 유례없던 폭염을 겪어낸 금년은 특히 그러하다. 하루이틀 사이로, 하늘이 그야말로 화닥닥 솟구치듯이 파랗게 위로 올라붙고, 새벽바람이 싱그러워지더니, 아아, 그러면 그렇지, 추석! 그리고 새하얀 햇살.○조상님네들에 감사

 몇천년전의 우리네 먼 조상들이 서쪽 어딘가에서 동으로 동으로 흘러오다가 이 산천에 닿아, 드디어 눌러앉을 생각을 한 것은, 대체 언제쯤이었을까. 아아. 그 슬기로움! 그리하여 추석차례는 가까운 조상님들도 모셔야겠지만, 그 먼 조상님네들까지 줄줄이 우리 곁으로 오시는 날이다 하는 생각이 저절로 일곤 한다. 더구나 지난 5월에는 네팔의 카트만두에서 자동차편으로 1천 가까운 티베트고원을 1주일에 걸쳐 라사(티베트 수도)까지 횡단해 보기도 했던 거여서, 우리네 산천에 대한 이 긍지와 확신은 금년따라 유다르다.

 해발 5천가 넘는 그 티베트고원은 아름다운 우리 강산에 비한다면 천형의 땅이었다. 남북분단이 어쩌네, 핵이 어쩌네, 우루과이 라운드가 어쩌네 하고, 안에서는 하루인들 바람 잘 날이 없지만, 저 티베트고원을 한번 지나보라. 우리가 그런 땅에 안 태어나고, 이 땅에 태어나길 얼마나 얼마나 잘했는가, 요행인가, 거듭거듭 먼 조상님네들에게 감사하고 싶어진다.

○북두칠성 보고싶어

 그나저나, 추석이 되면 나는 어김없이 북두칠성이 보고 싶어지고, 어머니 생각을 하게 된다. 나는 어머니에게서 한두번 아니게, 「칠성님의 자식」이라는 소리를 들었기 때문이다.

 현금에도 고을에 따라 그런 풍습이 짙게 남아 있을 터이지만, 내가 태어나던 60여년전 그 무렵에는 우리나라 어디를 막론하고, 아들 못낳는 며느리는 마물 취급을 당하였다. 그런데 우리 어머니는 내 위로 누님 둘을 낳으셨던 것이어서 노상, 안중근의사보다 한 살 위이신 조부님의 무서운 눈총 속에서 사셔야 했다. 조부님은 위인이 무척 사납고 기가 왕성하셔서 이 점에서도 유난하셨을 것이다. 아마 그래서도 더했을 터이지만, 우리 어머니는 그 무렵 매일 매순간을 「비손」으로, 시쳇말로는 「기도」로 사셨을 것이었다. 하눌님에게, 칠성님에게, 부처님에게, 아들 하나 낳게 해주십사고 비셨을 것이었다. 그리하여 나를 잉태하시고도 어머니는 얼마나 얼마나 전전긍긍하셨을 것인가. 이 참에도 또 딸을 낳는 날에는, 어머니로서는 인생 끝장이라고 생각하셨을 것이었다. 그리고 그 고초는 어머니의 고초이면서 동시에, 태 속에 있는 나의 고초이기도 했을 것이었다. 그때 어머니께서 자나깨나 전전긍긍하시던 마음자리가 지금 이 나이에서도 이다지나 손에 잡힐 듯이 느껴지는 건, 나도 어머니태 속에서 그 고초를 같이 겪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하여 내가 태어난 뒤에도 어머니의 그 버릇은 줄어들긴커녕 더욱 우심해졌다. 때없이 천지신명에게 비셨다. 보름밤에 뒤란 감나무 밑에 기직을 깔고 정화수를 떠놓곤, 나더러 절을 하래서 수없이 절을 하기도 했고, 외갓집 가는 길가의 산자드락 큰 바위에까지 어머니는 혼자 중얼중얼거리며 비손을 하셨다. 아아, 어릴 적의 나는, 그런 일을 지겹도록 겪었다. 그리고 그것은 곧바로 추석과 이어지고 맑은 가을하늘의 북두칠성과 이어진다.

 작금 몇년 동안에 우리는, 우리나라는, 송두리째 이런 분위기에서 몇 만리 몇 십만리나 멀어져 버렸을까. 근대화, 국제화, 효율화, 과학화라는 회오리 속에서, 그리고, 날로 늘어나는 전화, 라디오, 텔레비전, 컴퓨터, 오디오등등의 각종 정보단말의 홍수 속에서 우리는 얼마나 얼마나 얇아져 버렸는가. 피나는 경쟁 속의 어느 황폐한 광야에 통째로 내팽개쳐 버리지나 않았는지….

 재작년(92년)에 나는 중국여행길에 위해에 닿자마자 현지인의 오토바이에 치여 뒷등의 갈빗대 다섯 대가 부러지고 왼쪽 다리 무릎밑 보조뼈의 골절을 당했었다. 그야말로 중상이었다. 그런데 그렇게 오토바이에 치여 넘어지는 순간, 몽롱해지는 의식 속에서도 흘깃 내 눈에 비쳐온 것은 어머니 얼굴이었다. 어머니 얼굴을 보면서 나는 정신을 잃었던 것이다.

○어머니의 「비손」덕

 결국은 현지 해군병원에 입원하여 그야말로 VIP대접으로 닷새동안 담당의사와 간호사들의 극진한 치료를 받아 서울로 무사히 돌아왔다. 서울로 돌아와서도 스무날 가량 입원치료를 받아 완전히 회복이 되었는데, 지금에 와서 다시 가만히 생각해 본즉, 이것도 저승에 계신 어머니의 「비손」덕이 아니었을까 싶다. 어머니의 그 버릇은 어디로 갔을 것인가. 지금 저승에서도 살아생전의 버릇대로 노상 천지신명에게 「비손」을 하고 계실 어머니, 그때 몽롱해지는 의식 속에서도 흘깃 비쳐오던 어머니 얼굴은 바로 그 얼굴이었다. 비손을 하시던 얼굴이었다. 바로 어머니의 그 아들을 향한 지성덕으로 나는 거뜬히 나았지 않았을까.

 추석. 추석이 되면 나는 그 어머니가 사무치게 그리워진다. 그래서 북두칠성을 올려다보며 혼자서 가만히 「어머니」하고 불러본다. 엄마, 엄마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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