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끈질긴 「야욕」… 전전협정위반 42만건/(광복 분단 50년: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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끈질긴 「야욕」… 전전협정위반 42만건/(광복 분단 50년: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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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09.1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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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도발/「적화통일」기본노선 유지… 전술변화만/무장침투·대화 상황따라 화·전번갈아/1·21사태… 박대통령 저격미수… 아웅산묘테러등 줄이어 분단 50년은 한마디로 북한에 의해 저질러진 남북간 갈등과 충돌, 대립의 역사였다.  김일성의 무력적화통일 욕심에서 비롯된 6·25전쟁은 민족에 치유 불가능한 상처를 남겼다. 2백여만명의 인명피해를 낸 이 동족상잔은 전 국토의 폐허화로 민족을 기아와 빈곤의 구렁텅이에 몰아넣었다. 전쟁중의 증오와 적대의식은 민족의 동질성을 갈기갈기 찢어놓았으며 그 상흔은 아직까지도 1천만 이산가족들의 가슴속에 아물지 않는 한으로 남아있다.

 그런 의미에서 6·25는 아직 끝나지않은 전쟁이며 법적·형식적 측면에서도 잠시 전쟁을 쉬고있는 정전상태일 따름이다. 최근 이 정전상태를 평화체제로 전환시키는 문제를 둘러싼 남북갈등이 북한핵문제해결및 궁극적인 한반도평화체제구축에 큰 장애로 부각되고있다.

 6·25전쟁이후에도 남북은 끊임없는 충돌과 갈등으로 치유하기 힘든 감정의 골을 파왔다. 군사분계선상에서 하늘과 바다에서 그리고 남한 내부 깊숙한 「지하」에서 북한은 집요하게 「혁명과업」 수행을 위해 도발을 계속했다.

 유엔사의 집계에 의하면 53년 휴전성립 이후 지난해까지 40년동안 군사분계선상등에서 북한측이 위반한 정전협정 위반사례는 무려 42만6천여건에 이른다.

 물론 이가운데 북한측이 시인한 협정위반은 3건에 불과하다.

 군사분계선상의 충돌을 비롯, 북한이 휴전 이후 자행한 각종 대남도발은 근본적으로 대남 적화통일정책에서 비롯된다. 따라서 도발강도및 양상도 북한의 대남혁명 전술전략의 변천에 따라 일정한 변화를 보여왔다.

 53년휴전 직후 50년대후반에 걸쳐 김일성은 「조국의 평화적 통일을 위해 우선 공화국북반부의 민주기지를 강화해야 한다」는 「민주기지론」을 내세워 대내 체제정비및 경제복구에 주력하는 방어적 노선을 취했다. 이 시기에 일어났던 KNA기 납북사건을 비롯, 군사분계선상의 충돌및 무장공비침투는 우발적이거나 비교적 소규모 양상을 띠었다.

 그러나 북한은 5·16으로 남한에 반공이데올로기를 앞세운 군사정권이 들어서자 공격적인 대남전략으로 급선회했다. 군사력을 강화하고 남한사회의 불안정을 유도,분위기가 조성되면 무력통일을 달성하겠다는 계산이었다.

 이시기의 「4대군사노선」이나 「3대혁명역량강화」는 이같은 혁명 전략의 반영이었다.

 북한은 67년3월 지하당공작에 의한 거점확보 전술을 주장하는 대남온건파를 숙청하고 대규모 무장침투전술을 구사했다. 68년 1월21일 특수훈련을 받은 북한 124군부대 소속 무장공비 31명이 청와대습격을 기도한 「1·21사태」(군경23명사망) , 그 이틀후 동해의 공해상에서 활동중이던 미해군 정보함 푸에블로호 납치사건,같은해 10월 울진삼척지구의 대규모 무장공비침투사건등이 그 대표적 사례다.  특히 울진삼척 무장공비침투사건은 124군부대 무장공비 120여명이 후방 여러곳에 동시에 출현해 거의 공개적인 공작활동을 펼쳐 충격을 주었다. 이들의 소탕 과정에서 우리측 군민 70명이 목숨을 잃었다.

 67년의 해군 56함 격침사건(아군 39명사망), 69년에 발생한 미정보기EC121기격추사건(승무원 31명 전원사망)과 강릉발 서울행 KAL기 납북사건 역시 같은 맥락속에서 이루어진 북한의 대남도발이었다.

 그러나 이같은 북한의 무장침투 전술은 그들의 통일정책측면에서 볼때 완전한 실패작이었다. 무엇보다도 남한 국민들에게 북한의 무장공비침투는 6·25의 악몽을 되살리면서 북한에 대한 경계심을 한층 강화시켰으며 군사정부에는 더할나위 없이 좋은 반공교육자료를 제공했던 것이다.

 북한은 이에따라 69년 그동안 무장침투전술을 주도했던 대남공작팀을 대거 숙청하고 일단 겉으로는 평화공세노선으로 복귀한다. 김정일이 대남사업에 본격적으로 등장한 것은 바로 이 시기였고 7·4 남북공동성명 남북적십사회담진행등 일시적인 남북화해분위기는 이같은 북한의 대남정책 변화를 배경으로 한 것이었다.

 그렇다고해서 북한이 대남적화혁명노선을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 북한은 이때부터 겉으로는 대남 평화공세를 펼치면서 실제로는 남한내에 지하공작거점 마련에 주력하는등 본격적인 화전 양면전술을 구사했다.

 북한은 71년 남북대화를 개시하면서 동시에 휴전선 비무장지대 일대 주요전략지점에 남침용 땅굴을 팠다. 이 땅굴은 유사시 대규모 병력과 중화기를 군사분계선 남쪽 후방에 투입, 속전속결의 기습전을 감행키 위한 것으로 74년 처음 발견된 이래 지금까지 모두 4개가 발견됐다.

 74년 8월15일 8·15경축식장에서 발생한 박정희대통령 저격미수사건 역시 국민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이충격이 채 가시기도 전인 76년 8월에는 판문점 공동경비구역안에서 북한경비병 30여명이 유엔군측 경비병들에게 도끼를 휘둘러 미군장교2명을 살해하고 9명에게 중경상을 입히는 만행을 저질렀다.

 83년 버마를 친선방문중이던 전두환대통령일행을 노린 아웅산국립묘지폭파사건은 정부요인및 경호원 17명의 목숨을 앗아가 전세계를 경악시켰으며 북한을 국제사회에서 폭력적 테러집단으로 낙인찍는 계기가 됐다.

 87년11월 당시 버마 근해 안다만 상공에서 북한 공작원에 의한 대한항공 858편폭파사건은 다음해 서울에서 열리는 올림픽을 방해하기 위한 북한측의 소행으로 밝혀져 또다시 세계를 놀라게 했다. 

 80년후반부터 본격화된 북한의 핵무기개발시도는 본질적으로 북한이 그동안 구사해온 화전양면전술의 연장이라고 할 수 있다. 북한은 최근 한국과 미국등을 상대로한 핵 줄다리기에서 경수로지원및 미국등 서방세계와의 관계개선을 대가로 핵무기개발을 포기하는 수순을 밟고 있다. 북한이 이를 계기로 대남혁명전략에서 평화공존과 평화통일의 길로 나서게 될것인지가 주목되고 있지만 지난 50년동안의 남북간 갈등과 충돌로 형성된 감정이 쉽사리 해소되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휴전후 주요 도발사건

58. 1.16 KNA기(창랑호) 납치

65. 9.27 경북 안동지역 무장간첩단침투,양민학살

67. 1.19 동해상 해군56함 피격침몰

68. 1.21 무장공비 청와대 습격

68. 1.23 미해군함정 푸에블로호 납치

68.11. 3 울진 삼척지역 무장공비 침투

69.12.11 EC 121 미해군 정찰기 격추

69.12.11 KAL기 강릉상공서 납치

70. 6.22 국립묘지 현충문 폭파사건

74. 6.28 해양 경비정 863함 격추침몰 승무원 납치

74. 8.15 대통령 저격미수 사건, 륙영수여사 피격사망

74.11.15 서부전선 고랑포북방에서 제1땅굴 발견

75. 2. 8 중부전선에서 제2땅굴 발견

76. 8.18 판문점 도끼만행사건

77. 7.14 강원도 거진 북방 유엔군 헬기 격추

78.10.17 판문점 남방 4지점서 제3땅굴 발견

81. 8.26 SR 71정찰기 대공미사일 공격

83.10. 9 버마 아웅산묘지 암살폭파사건

83.12. 3 다대포 무장간첩 침투

87.11.29 KAL 858편 버마 안다만해역 상공에서 공중폭 파

90. 3. 3 동부전선 양구지역에서 제4땅굴 발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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