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용정:하/초라한 무덤에 잠든 “항일의 함성”(두만강:11)
알림
알림
  • 알림이 없습니다

용정:하/초라한 무덤에 잠든 “항일의 함성”(두만강:11)

입력
1994.09.13 00:00
0 0

◎기미 3·13만세운동… 학생등 19명 희생/윤동주묘지 등 곳곳엔 투쟁의 유적 독립투쟁의 도시 용정에는 피끓는 청년들의 고결한 희생과 투쟁의 함성이 스며 있다. 함성의 흔적은 시내 한복판 미식거리에 있는 용정중앙소학교(구 간도 중앙소학교)에서 시작된다. 간도독립운동의 한 정점인 3·13만세운동의 현장이다. 학교 뒤편 공터에는 용정시 소방중대가 들어섰고 집회시작을 알렸던 성당의 종루 역시 문화혁명때 파괴돼 현대식 시멘트건물로 바뀌었지만 학교를 파한 아이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가면 개펄처럼 남은 낡은 교사는 엄숙한 역사의 표정을 되찾는다.

 3·1운동 직후인 1919년 3월 13일 서전벌판으로 연결된 이 학교의 뒷마당에 2만여명이 모여 항일집회를 열었다. 국자가(지금의 연길), 개산둔 , 화룡, 명동등지에서 밤새워 모여든 청년들이었다. 정오에 성당의 종소리를 신호로 시작된 민중대회는 김약연목사등 17명의 대표가 독립선언포고문과 공약3장을 낭독하는 가운데 우레같은 독립만세소리로 뒤덮였다. 함성의 물결은 곧 시내로 쏟아져 나왔다. 일본총영사관을 향한 시가행진이 시작된 것이다. 명동학교의 교원과 학생으로 조직된 충렬대가 행렬을 이끌었다. 일본경찰과 이 지역에 주둔해 있던 만주군벌 맹부덕부대는 시위대를 향해 총부리를 들이대 30여명의 사상자가 났다. 13명은 그 자리에서 숨지고 부상자중 6명도 치료를 받다가 숨졌다. 학생들의 희생은 간도의 울분을 폭발시키는 도화선이 되었다. 5월말까지 2개월여동안 간도전역에서 7만여명이 참가한 50여회의 집회와 시가행진이 잇달았다. 간도의 독립운동은 여기서부터 무장투쟁의 굽이로 접어들어 봉오동이나 청산리대첩등의 높은 봉우리로 치솟게 된다.

 함성이 잠든 곳은 시내를 벗어나 명동촌 방향으로 거슬러가는 곳에 있는 3·13묘지이다. 용남촌 부근의 큰 길에서 미루나무가 늘어선 논둑길을 따라 가면 세월에 깎여 야트막한 언덕이 돼버린 묘들이 눈에 들어온다. 「삼·일삼 반일의사릉」이라고 적힌 대리석 묘비가 없다면 아무도 찾지 않는 무연고분묘로 지나칠 법하다.

 3·13운동 희생자들의 묘소를 발굴한 것은 89년말. 개방의 시대를 맞아 민족주의에 대해 중앙정부가 관대해지자 연변의 사학자들은 문혁의 광풍에 조각난 조선족의 역사를 복원해 가기 시작했다. 인근 마을 노인들의 입에서 나온 만세묘지라는 단서 하나로 시작된 발굴작업은 90년 4월 마을주민들과 학자들의 고증을 통해 마무리됐다. 93년 5월 한국독지가의 도움으로 묘비가 세워졌지만 휑한 벌판에 있는 13기는 여전히 초라하기 그지없다.

 언덕을 오르면 또 다른 투쟁으로 숨진 시인의 무덤이 있다. 윤동주의 묘지이다. 해방을 몇달 앞두고 후쿠오카형무소에서 숨진 시인은 화장된 채 뼈만으로 돌아와 이 자리에 묻혔다. 찾는 이없이 버려졌던 시인의 묘지는 80년대 후반 한국관광객들이 몰려들면서 명소로 바뀌었다. 봉분주위에는 시멘트로 띠를 둘렀고 상석도 새로 놓았다. 시인의 모교인 은진중학을 통합한 용정중학이 자랑스러운 졸업생을 기리는 뜻에서 수선작업을 한 것이다.

 맞은편에 펼쳐진 비암산 사이로는 용정시가지가 길다랗게 늘어서 있다. 항일투쟁의 유적들은 30여만명의 상공도시로 새롭게 태어나는 용정의 역사를 증언해주는 상징이 되고 있다.

◇특별취재부

권주훈부장대우(사진부)

이준희기자(사회부)

이재렬기자(기획취재부)

◎“또 하나의 별” 송몽규/문예·독립투쟁·옥사… 외사촌 윤동주에 가려

 용정시가를 굽어보는 동산기슭에는 윤동주와 그의 그늘에 가려진 또 하나의 별 송몽규가 묻혀 있다. 사촌간인 두 사람은 명동촌의 같은 집에서 같은 해(1917년)에 태어나 같은 장소(후쿠오카형무소)에서 같은 해(45년) 옥사했다(윤동주 2월 16일, 송몽규 3월 10일). 소학(명동) 중학(은진) 대학(일본 동지사)까지 같은 학교를 다녔고 체포됐을 때의 죄목(치안유지법위반)도 같았다.

 사후에 윤동주는 친족들이 유고시집을 발간한 반면 그의 고종사촌 송몽규는 남아 있는 글이 거의 없어 평가기회를 얻지 못한채 잊혀졌다. 윤동주는 정지용이 발문을 쓴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로 민족시인의 반열에 올랐지만 송몽규는 윤동주를 이야기할 때나 언급되고 있다.

 그러나 송몽규는 윤동주 문익환등과 더불어 소학때부터 문예활동을 했고 중3때인 35년1월 동아일보 신춘문예를 통해 등단했다. 문사의 길은 먼저 들어선 셈이다. 송몽규는 무장독립투쟁의 요람중 하나였던 남경군관학교를 다닌 열혈청년으로 후쿠오카형무소의 형기도 윤동주보다 6개월이 긴 2년6월이었다.

 두 사람이 넋으로 다시 만난 것은 90년 4월. 용정시 지신향 장재촌에 버려진 송몽규의 묘가 발견돼 윤동주묘곁으로 이장된 것이다. 죽음으로 헤어진지 45년만이었다.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