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년대 힘우렬 역전… 과거입장 맞바꿔/남 교류·신뢰정착중점… 북 「연방제」 고수/현정부 “자유민주방식” 확고… 북태도·정세대응 완급조절도 지난 20여년간 남북회담 일선에서 종사해온 정부의 한 당국자는 『현재 회담 및 통일문제에 임하는 남한과 북한의 자세는 70년대초와 정확하게 역전된 느낌』이라고 종종 말한다. 70년께 당시 중앙정보부에 근무하던 그는 상사로부터 『박정희대통령이 북한에 대한 걱정 때문에 매일 밤잠을 못이룬다』는 말을 들었다고 한다. 당시 정권이 71년 남북적십자회담으로 시작되는 일련의 남북회담을 추진, 일시적인 남북간의 유화국면을 모색했던 것은 닉슨독트린과 미군의 베트남철수, 베트남통일등 주변정세의 변화속에서 당장 안보의 길을 찾기 위해 내놓았던 고육지책이었다는 것이다. 해방이후 50년간 우리의 통일정책은 남북한간 역학관계와 밀접하게 연관돼 변화해왔다. 앞서 당국자의 지적처럼 남북한 힘의 우열이 역전되면서 서로가 상대의 과거 정책을 맞바꾸어 답습하게 된 측면도 일부는 있다.
지난달 15일 김영삼대통령은 「민족공동체 건설을 위한 3단계 통일방안」을 발표하면서『남북한간 체제경쟁은 끝났다』고 선언하고 『자유민주주의에 의한 통일만이 가능하다』는 입장을 분명히 했다.
이같은 「승리 선언」이 나오기까지 우리측의 통일방안은 1공화국의 「북진통일론」, 2공화국이후 70년대까지「선건설-후통일론」, 3공화국중반이후「선교류-후통일론」, 5공화국이후 신기능주의적 접근방법에 의한 「단계적 통일론」에 이르기까지 점차 적극성을 강화해가는 변화의 과정을 밟아왔다. 같은 시기 북한은 60년 연방제를 처음 제안한 이후 골격은 유지해왔으나 그 내용면에서는 「선혁명-후통일」을 위한 적극적인 연방제에서 체제보존을 위한 연방제라는 입장으로 점차 소극화하고 있다. 남측이 적극적으로, 북측이 소극적으로 입장이 맞바뀌는 과정이 각각의 국력추세와 비례하고 있음은 물론이다.
국력이 열세에 놓인 상태에서 나올 수 있었던 현실적인 대안은 「선건설-후통일론」이었다. 이는 통일정책이라기 보다는 「적화통일을 피하겠다」는 가장 소극적인 형태의 정책이라고 볼 수 있다. 박정권때까지 생명을 유지한 이같은 정책기조는 4·19혁명이후 일반에서 통일열기가 가열되고 있는 가운데 2공화국 정권에 의해 원형이 만들어졌다.
윤보선대통령은 60년 민의원·참의원 합동회의에서의 취임연설을 통해『통일이전이라도 우리는 먼저 이 나라를 부강하게 만들어야 한다』면서『그렇게 될 때에만 한국의 통일은 의의가 있을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61년 5·16군사쿠데타로 집권한 박정권도 70년대까지 통일문제에 관한 한 정책기조를 변화시킬 수 없었다. 당시 군부는 혁명공약의 제5항에서『국토통일을 위해 공산주의와 대결할 수 있는 실력배양에 힘쓴다』고 발표,「선건설-후통일」의 정책기조를 일단 답습하고 있다. 다만 3공화국정권은 초기 대북정책에 있어서는 소극적인 입장을 견지하면서 국내적으로는 2공화국 때 일시적으로 활성화했던 민간통일운동을 억누르는등 반공주의적 성향을 강화했다.
이같은 정책기조를 고수하는 동안 남북관계에서, 또는 국제무대에서 남한은 수세적인 입장에, 북한은 공세적인 입장에 놓이게 됐다. 이 기간에 특기할 만한 사실은 북한측이 체제우월감을 바탕으로 우리측에 대해 교류협력을 여러 차례 제의하고 있다는 점이다. 60년 8월15일 김일성이 해방15주년 기념보고에서 제기하고 있는 대남제의는 마치 오늘날 우리측이 발표하는 대북선언을 연상케 하는 대목이 있다. 그는 이 보고에서 『남조선당국이 우리가 내놓은 연방제를 받아들일 수 없다면 남북사이의 물자를 서로 교역하며 경제건설에서 서로 협조하고 원조하도록 제의한다』면서 『그래서 정치문제를 제쳐놓고라도 먼저 남조선동포들을 가난에서 구원해야 할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같은 북한측의 통일공세에대해 우리측은 유엔감시하의 남북한 자유총선거라는 방안만 내세울 뿐 종합적인 통일정책은 없었다.
70년 8월15일 박대통령은 북한에 대해 선의의 경쟁을 촉구하는 「평화통일구상선언」을 발표했다. 남북한 경제력이 균형을 이루기 시작한데 따른 자신감을 드러낸 것이었다. 1인당GNP의 경우 72년을 기점으로 역전되기 시작, 80년에는 남한이 북한의 두배를 넘어서게 됐다. 남한측은 72년 7·4공동성명, 73년 「평화통일외교정책선언」(6·23선언)을 잇달아 내놓으며 북한을 처음으로 정치실체로 인정하고 유엔동시가입등 장기공존을 추진하기 시작했다. 정부내에서는 실현가능한 분야부터 교류를 하면 자연스러운 「파급효과」로 정치적 통일도 이루어진다는 「기능주의적 접근방법」이 지배적 기류로 자리잡았다.
단편적인 선언으로 발표됐던 통일정책들은 82년1월22일 「민족화합민주통일방안」이 발표됨으로써 체계화된 통일방안의 모습을 갖추게 됐다. 5공화국들어 통일정책의 특징은 남북정상회담개최와 시범협력사업추진등을 시도,대북정책에 적극성을 띠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이같은 접근방법은 경제사회분야의 교류만으로는 통일을 앞당기는데 한계가 있으므로 정상회담등 정치분야의 노력을 가미해야 한다는 「신기능주의」노선으로 오늘날까지 통일방안의 기조가 되고 있다. 6공화국출범후 89년9월11일 발표된 한민족 공동체 통일방안은 통일국가에 이르는 중간과정까지 그려내 통일에 이르는 청사진을 완성했다.
5공화국이후부터 정책이 대북회담과 교류를 서두르던 입장이라면 김영삼정부의 통일정책은 김일성사후 북한체제의 안정을 도모하는등 속도의 완급을 조절, 통일국면을 「관리」해보겠다는 기조의 변화가 있다.【유승우기자】
◎남북대화 24년/유화·경색 되풀이… 회담 총3백20차례
71년 8월20일 남북 적십자회담을 위한 파견원 접촉이 판문점에서 열린 이후 지금까지 24년동안 남북한 당국간에는 모두 3백20차례의 크고 작은 회담이 개최된 것으로 집계됐다.
흔히 남북회담은 『가다가 서기를 반복하는 징검돌뛰기와 같은 것』이라고 한다. 꾸준하게 진전되는 것이 아니라 양측이 합의를 이루고 성과를 발표한 뒤 얼마가지 않아 긴 경색국면에 빠지는 형태를 되풀이 한다는 것이다. 적십자 제1차 본회담(72년 8월29일·평양)을 성사시키기 위해서만 4차례의 파견원접촉, 13차례의 문안정리를 위한 실무회담, 25차례의 예비회담이 열려야 했다. 올해 6월 남북정상회담이 단 두번의 실무대표접촉과 한번의 예비회담만으로 타결될 수 있었던 것과 대조를 이룬다.
횟수는 많지 않지만 결실이 있었던 것은 84∼85년 대화시기. 북한측이 수재물자를 인도하는가 하면 이산가족 고향방문단및 예술공연단을 상호교환할 수 있었다.
86년 팀스피리트훈련 실시, 87년 KAL 858기 폭파사건등으로 사실상 중단됐던 대화는 88년8월 국회회담 준비접촉을 시작으로 4∼5년간 만개했다. 88년부터 핵문제가 전면에 등장한 93년1월까지 개최된 남북회담및 접촉은 남북 고위급회담및 관련회담 70회, 핵통제위원회 관련회담 25회, 남북체육회담 관련 23회, 적십자회담 관련회담 18회등 모두 1백60여차례에 달해 전체 횟수의 52%를 차지하고 있다.
93년 10월5일부터 지난3월19일까지 8차례 개최된 특사교환을 위한 실무대표접촉은 북한측 수석대표의 「서울불바다」발언으로 결렬됐고, 지난6월28일 합의된 남북정상회담도 개최2주일전 김일성이 사망, 무기한 연기된 상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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