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즈음 우리는 나라 안팎의 정세의 변화를 곧잘 포스트냉전이니 탈냉전이라 부른다. 이 「포스트」와 「탈」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우선 냉전자체의 의미부터 정확히 파악해야 한다. 냉전은 멀리는 근대적인 의미의 사회주의 체제가 성립한 후부터, 가깝게는 제2차 세계대전후 특히, 1947년 3월 트루먼 독트린의 발표이후 본격적으로 전개된 정치현상이다. 우리가 미소냉전 또는 동서냉전으로 불렀던 지구상의 양극체제는 이미 붕괴되었고, 그 냉전의 마지막 고도가 한반도이다. 미소냉전은 무엇보다도 이데올로기의 전면적 양극화요, 거기다 군사력의 세계적 조직화가 합쳐 이루어진 역사상 미증유의 대결구조였다. 미소냉전은 미소이외의 다른 나라의 국민에게 타율적인 양자택일을 강요했으며 수많은 인간에게 처참한 희생을 가져다 주었다. 1950년대 후반부터 비동맹중립이라는 제3의 길이 등장했으나 한반도 냉전은 동족상잔의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양극적 대결이외의 선택지를 갖지 못했다. 그래서 좌우상하의 차이는 있지만, 7천만동포 전부가 냉전과 분단의 멍에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다. 이렇게 볼 때 탈냉전은 우리가 소망했던 역사의 방향이요, 냉전의 청산은 통일에 앞서 우리가 이룩해야 할 중대한 정치과제이다. 따라서 우리는 냉전과 탈냉전을 악마와 천사의 사상논쟁으로 파악할 것이 아니라, 탈냉전의 세계정신을 한반도의 특수한 상황에 어떻게 접목시킬 것인가하는 문제에 눈을 돌려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탈냉전상황 자체를 다음과 같은 3가지 수준에서 분석적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첫째, 세계적 수준의 미소냉전의 붕괴이다. 사실 미소냉전은 한 쪽이 다른 한 쪽의 직접침략에 의해 붕괴될 가능성은 애당초 없었다. 미소냉전의 붕괴도 소연방 자체가 스스로의 결함때문에 내부붕괴한 결과이다. 미소냉전체제의 붕괴는 2천5백년의 인류정치역사에서 보면 고대보편사회의 붕괴와 중세사회의 붕괴에 견줄만한 문명사적 대전환이라고 할 수 있다. 고대로마의 붕괴는 신선한 기독교의 등장으로, 그리고 중세천년의 붕괴는 르네상스와 종교개혁의 2대 운동에 의해 새로운 세계질서로 이어졌다. 그런데, 세계수준의 미소냉전체제는 완전히 붕괴했지만 그 공백을 메울만한 위대한 대체사상이나 운동은 보이지 않고 그저 다양한 「문화충돌」이나 공존으로 역사가 표류하고 있는 느낌이다. 다만, 분명한 것은 이러한 사상적 혼미에도 불구하고 세계적 수준의 탈냉전으로 인한 전쟁의 가능성을 현저히 줄임으로써 평화의 메시지를 지구촌 구석구석에 전달하여 역사적 화해의 무드가 고조되고 있는 점이다.
둘째, 남북한 냉전체제의 엄존이다. 엄밀한 의미에서 한반도 냉전의 해결없이는 냉전의 완전한 종말을 말할 수 없다. 그런데 초기냉전시대에는 미국과 소련이 중심이 되는 계열화로 인하여 냉전의 틀 속에서도 남북한이 각기 체제 자체의 안정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미소냉전 붕괴후의 남북한은 위로부터의 조직적 통제력을 결여한채 각기 체제역량의 극대화를 위해 모든 자원을 동원하고 있어 근친증오현상이 증폭되고 있는 실정이다. 한반도 평화는 상대가 있는 일이기 때문에 일차적으로 북한의 선택, 즉 북한이 세계대세에 적응하여 핵문제의 해결과 함께 남한과의 평화공존을 통하여 점진적인 개방개혁을 추진해 나갈 것인가 아닌가에 달려 있다. 지금 이 순간 남북한의 냉전은 평화공존이냐 파국이냐 하는 큰 전환의 정점에 서 있다고 볼 수 있다.
셋째, 대한민국 내의 냉전상황이다. 미소냉전과 그 축소판인 남북한의 대결구도가 계속되는 동안은 남한 내에서 냉전이 자생할 수 있는 여지는 없었다. 역설적으로 말하면 남한 내의 공공연한 냉전은 세계적 수준의 냉전체제의 붕괴의 산물이며, 거기다 북한이 탈냉전의 기류를 타고 있지 않기 때문에 더욱 큰 정치쟁점으로 부각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한국의 국내 냉전은 ①무냉전 ②냉전 ③탈냉전의 과정을 밟아 갈 것이며, 지금 우리는 ②에서 ③으로 가는 이행기에 있다고 볼 수 있다. 그 이행기에 나타난 주사파논쟁은 일종의 과도기적 질병이며, 반드시 긍정적인 방향으로 해소되리라고 본다. 두 말할 것도 없이 국가의 기틀을 위태롭게 하는 사상이나 운동은 남북한 간에 냉전이 엄존하는한 실정법에 의해 규제되어 마땅하다. 요컨대 한국 내의 냉전청산은 위와 같은 냉전의 중층적 의미에 대한 정확한 인식을 토대로 하여 체계적으로 추진되어야 하는 것이다. 분단은 냉전의 산물임에 틀림없지만, 탈냉전이 자동적으로 분단의 평화적 해결로 이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여기서 또 한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우리 사회에는 주사파와는 전혀 세계관을 달리하는, 민주화와 탈냉전을 연결시키려는 건전한 민주시민세력이 존재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들의 선의의 노력마저 진부한 사상논쟁으로 몰아붙이려는 일부의 의도는 그 질이 좋아 보이지 않는다.
우리 대한민국사회가 시대착오적인 주사파의 주장에 흔들릴 정도로 불건강하지 않다는 판단기준은 소모적인 사상논쟁에 신선한 지침을 제공했다. 탈냉전시대에 적응하기 위해서는 선악 이분법의 논쟁은 이제 그만했으면 좋겠다. 진보도 진보 나름, 보수도 보수 나름이기 때문이다. 선과 악, 극좌와 극우 사이에 존재하는 양질의 저력을 수렴해 가는 것이 탈냉전시대에 걸맞는 통합의 정치이다. 말이 통하는 보수와 말이 통하는 진보를 같이 존중할 수 있는 관용과 용기가 바로 탈냉전시대에 어울리는 덕목이 아닐까.<고려대교수·한국평화연구원장>고려대교수·한국평화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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