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마득한 옛날 당나라 함통연간(860∼874)에 수도 장안에는 방림십철이라는 시인그룹이 있었다. 「구화사준」, 즉 허당·주요·장빈·장교등 중국 강남출신 시객이 주요 멤버였다. 구화는 「지장보살의 현신」이라 불리던 신라 왕자출신 고승 김교각(656∼794)이 일찍이 75년간 수도하며 일대 지장성지로 일궈낸 안휘성 청양현 구화산을 일컫는다. 오는 9월5일(음력 7월30일) 김교각 입적 1천2백주년을 맞아 성대한 기념행사가 열리는 바로 그 구화산이다. 방림십철은 시주를 함께 하며 사회풍자와 은일의식을 즐겼다. 농민을 연민하고 권귀을 조롱하는등 백성의 아픔과 괴로움을 주제로 시를 썼다. 이러한 청고한 시풍은 가도·요합·피일휴·두순학·은문규·고비웅등 시우들을 사로잡아 만당을 특정짓는 시파를 이루었다.
당시 수많은 신라의 젊은이들이 학업을 위해 당으로 건너 갔다. 어느 핸가는 국자감 체류시한 10년을 넘긴 신라 유학생 1백5명이 강제 추방당하기도 했다. 동방문학의 비조 고운 최치원도 그 즈음 당나라에 유학해 18세에 진사 급제하고(874) 문명을 천하에 떨쳤다.
신라유학생들은 방림십철 및 그 시반들과 왕성하게 교유했다. 그들은 만남 속에서 다시 헤어져야 하는 애절함을 서정성 넘치는 시어로 써 남겼다. 전당시에는 당인이 신라인에게 바친 증송시 41수가 실려 있어 국경을 초월한 그들의 우선관계를 짐작케 한다.
여기서 방림십철의 본거지 구화산을 다시 주목해 보자. 전당시에는 구화산의 수려한 경관과 김교각의 공덕과 일생을 찬미하는 시 80여수가 담겨 있다. 대부분 방림십철과 그 시붕들의 작품이다. 1천1백여년전 중국에는 구화산을 중심으로 거대한 친라파 지식인그룹이 형성돼 양국간의 폭넓은 교류의 교량역을 맡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구화산의 모든 일들은 그러나 그후 역사책 속에 화석처럼 담긴 채 우리와는 소식이 완전히 절연돼 있었다. 다행히 1천2백주년행사에 국내에서 많은 신도들이 참배를 위해 순례길에 오른다는 소식이다. 때맞춘 국제학술심포지엄에는 한국측에서 세 편의 논문도 발표될 예정이다. 또 1천3백여점의 구화산 불교문물을 곧 국내로 들여와 소개하는 전시회도 준비중이라고 한다.
구화산은 우리와 시연만 있는 게 아니다. 기록에 의하면 김교각 시절에는 「동승운집」할 정도로 불교교류도 활발했었다. 온산에는 신라와 얽힌 얘기들이 신화와 전설, 민속과 민담, 인정과 풍물등에 녹아 여태 무궁무진 전해오고 있다. 그래서 구화산은 비록 중국에 위치하고 있다 해도 「우리 땅」이나 다름없다고들 말한다. 앞으로 구화산에서 우리 주도하에 종합적인 학술조사를 대대적으로 실시해 봄직도 할 것이다. 이를 통해 잊혀졌던 우리 역사의 한 장을 재조명해 되찾게 된다면 이 어찌 자랑스럽고 즐거운 일이 아니겠는가.<통일부장>통일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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