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송정·용주사도 세월 무게에 사라져/이주민이 발견한 「용두레 우물」은 조선족 원천으로 남아 「일송정 푸른 솔」로 시작되는 유명한 가곡 「선구자」의 원래 제목은 「용정의 노래」이다. 작곡자 조두남(84년 작고)의 회고록 「나의 넋두리 나의 세월의 앙금」에 의하면 만주를 방랑하던 1933년, 목단강주변의 여인숙에 불쑥 찾아와 윤해영이라고 이름을 밝힌 젊은이가 꼬깃꼬깃한 종이에 쓰인 가사를 내밀었다. 초췌하지만 형형한 눈빛이 독립운동가임을 알 수 있게 했던 청년은 『달포 뒤 찾아와 노래를 배우겠다』며 황망히 떠났으나 그뒤 다시 만날 수 없었다. 조두남은 이 청년에게서 발견한 독립투사의 기상을 기리는 뜻에서 해방후 「선구자」라고 제목을 고쳐 붙였다.
노래의 유래가 그러하듯 「선구자」가사는 그대로 용정의 모습이다. 윤동주의 고향 명동촌을 떠나 30가량 북상하면 구릉지대가 끝나면서 탁 트인 평야를 만난다. 두만강에서 연변조선족자치주의 주도 연길까지의 딱 중간쯤 되는 곳이다. 일송정은 이곳 용정 너른 벌에 홀로 우뚝 솟은 비암산 정상에 서 있다.
그러나 정작 일송정에 오르면 「선구자」의 비장감은 일순간에 사라져 버리고 만다. 시멘트골격에 울긋불긋한 색깔을 입힌 중국식 작은 정자가 워낙 생경한 까닭이다. 원래 일송정은 가사대로 정자처럼 그늘이 넉넉한 한 그루 푸른 소나무였다. 늠름한 기개와 고절의 표상이었던 노송은 이제 등걸로도 남아 있지 않고 대신 그 자리를 차고 앉은 조잡한 정자가 공연히 뻔뻔스러워 보인다. 번듯한 나무 한 그루 보기 힘들어 주변도 썰렁하기 그지없다.
비암산은 서울의 남산정도인 듯한데 주변이 평지인 탓에 상당히 높아 보이며 화강암이 곳곳에 노출된 골산이어서 일찍이 시인 김기림이 「간도의 내금강」이라고 읊었을 만큼 전체적 경관은 상당히 빼어난 편이다. 현지인들이 흔히 범이 웅크린 상으로 표현하는 비암산의 머리부분에 일송정이 있고 허리에 선구자탑이, 그 아래쪽에 연변TV방송국의 송신탑이 서 있다. 그러나 지난 91년 몇몇 한국인들이 뜻을 모아 세운 선구자탑은 1년도 채 안돼 민족주의의 발호를 우려한 중국당국에 의해 철거돼 기단만 흉한 몰골로 남아 있다.
비암산에서 한 눈에 내려다보이는 용정은 산지에 둘러싸인 분지모양이다. 서북쪽 평강령 틈새를 간신히 비집고 나온 해란강이 큰 물줄기로 바뀌면서 도시 한가운데로 흘러간다. 선구자가 말달리던 강변을 따라 연길과 함께 중국조선족의 양대 중심도시로 성장한 용정의 주택가가 길다랗게 형성돼 있다.
용두레우물터는 용정시내 한 복판 용정중학부근 삼거리 한 켠에 조그만 가로공원으로 단장돼 남아 있다. 「룡정지명기원지우물」이라는 한글이 씌어진 높이2가량의 석탑옆에 이곳의 유래가 자세히 설명돼 있다. 「1880년경 조선이민 장인석·박인언이 우물을 처음 발견해 우물가에 용두레를 세우고 우물이름을 용정이라 했으며 그것이 마을이름이 되었다」는 내용이다. 용두레는 우물물을 퍼올리는 장치로 그 모양이 용머리를 닮았다 해서 불리는 이름이다.
시내 초입 용문교에는 구름을 타고 비상하는 황금색 용장식이 해란강을 가로지르는 다리 양편을 치장하고 있다. 최근의 건축물이 대개 그렇듯 88년10월에 만들어진 이 다리의 치졸한 모습도 「선구자」가사에 담긴 깊은 뜻과는 거리가 멀다.
비암산으로 오르는 길목에 있었다던 저녁종소리 그윽했을 용주사도 터조차 알아볼 수 없는 주택가로 변해버렸다. 이제는 어디에서도 선구자의 자취는 찾기 힘들다. 용정은 이웃 연길을 뒤쫓는 상업중심지로, 백두산여행길에 반드시 들르는 역사관광지로 하루가 다르게 바뀌어가고 있다. 오랜 정체에서 깨어나 아침마다 용문교의 넓은 시멘트포장도로를 자전거행렬로 메우는 용정사람들은 달라진 시대의 새로운 선구자상을 만들어가고 있는 중이다.<특별취재반 권주훈 부장대우(사진부)이준희기자(사회부)이재렬기자(기획취재부)>특별취재반>
◎「선구자」의 수난/작사자 윤해영 변절친일시인 밝혀져 “충격”
조국수복의지를 장렬하게 노래한 「선구자」는 세대와 계층을 뛰어넘어 온 국민이 사랑하는 국민가곡이다. 행사장이나 술자리에서, 심지어 운동권집회에서도 불리는 「선구자」는 그러나 작사자 윤해영의 새로운 면모가 알려지면서 시비에 휘말렸다.
작곡자 조두남의 회고를 통해 비장한 청년독립지사의 이미지로 알려진 윤해영이 일제괴뢰 만주국을 찬양·합리화하는 글을 쓴 변절친일시인이었다는 사실이 당시 사료를 통해 지난 91년 처음 알려진 것이다. 「선구자」가 「낙토만주에서 터를 닦는 선구자」로 바뀐 친일시까지 발견돼 이 노래를 아껴온 많은 이들에게 충격과 배신감을 안겨주었다.
또 최근 연변대 조선어문학과교수 권철씨(65)는 윤해영이 독립운동가가 아닌 시인이었으며 만주국의 친일조직인 협화협회에서 활동했고, 해방후 함북 회녕으로 가 그곳에서 사망했다고 구체적 행적을 밝혀내 오랫동안 가려졌던 베일을 벗겨냈다. 이런 이유등으로 이 노래는 지난해 림정선열5위 영결제전때 조가로 선정됐다가 독립운동 유관단체등의 격렬한 반대로 취소됐다. 「선구자」는 작곡시기가 10여년 앞선 박태준곡 「님과 함께」의 모작이라는 표절시비에 휘말리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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