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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성」1,000년전설 현실로/한·몽조사단 다리강가 성터 발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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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성」1,000년전설 현실로/한·몽조사단 다리강가 성터 발굴

입력
1994.08.2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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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성공법 백제·고구려 혼합형/적벽돌·기와등 선조손길 확인/적석총은 중국 집안 발견유적과 유사/우리문화 몽골전파 연구에도 큰 도움 몽골 수흐바타르도(아이막) 다리강가 지역에서 발굴된 고구려 성터로 추정되는 유적과 유물은 고구려의 영토가 대흥안령산맥을 넘어 베이얼호 근처의 광대한 초원지대에까지 이르렀음을 보여주는 획기적인 단서라고 볼 수 있다. 이번 발굴은 다리강가 주민들 사이에서 1천년동안 떠돌던 고구려성터의 전설을 한국과 몽골의 고고학자들이 공동으로 참여하여 발굴함으로써 더욱 의미가 깊다.

 발굴현장인 다리강가군(솜)은 몽골에서도 목초의 질이 좋아 고대부터 정착민들이 무리를 지어 살고 있었으며, 몽골 고고학자와 주민들이 모두 『고려성이 있었다』고 증언하고 있는 곳이다.

 몽골 고고학 및 역사학계의 대표적 학자인 헨 페를레가 1961년에 출간한 「몽골인민공화국 고중세 성읍지약사」중의 『다리강가 지역에 건물벽돌이 많이 출토되고 엣 건축물 흔적이 있는데, 고려성 자리로 보인다』고 적은 기록은 이 지역 사람들의 증언과 일치한다.

 이같은 조사기록과 주민들의 증언에 따라 발굴된 유적·유물은 성의 지반을 다진 흔적과 주춧돌, 적색벽돌, 적색기와, 돌을 장방형으로 쌓아 만든 적석총 등 10여점이다.

 성터의 경우 건물과 성벽이 모두 무너져 겉으로 드러나 보이지는 않았지만, 군데 군데 작은 둔덕을 형성하고 있어 주변지역과는 확실히 구분되었다. 또 성터 안쪽으로는 주변에서는 찾기 힘든 돌들이 무더기를 이루고 있있다.

 조사단은 성터의 중심과 성벽으로 보이는 세 곳을 선정하여 가로 2와 세로 5정도의 넓이로 계단식으로 발굴한 결과 3∼4개의 지층으로 형성돼 있는 것을 확인했다.

 손보기 한몽공동학술조사단 단장은 『이 지역은 몽골초원, 만주, 중국중원을 연결하는 군사적·경제적 요충지인 만큼 고대부터 각 국간 세력다툼이 치열했던 곳이다. 따라서 이 지역의 주인이 바뀔 때마다 성을 증축했고, 각 지층은 해당시기를 나타낸다』고 말했다.

 그는 또 『기록과 증언에 의하면 맨 위층이 원나라때 구축된 것이며, 그 아래는 시기적으로 10세기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특히 맨 아래층은 성을 쌓는 공법이 백제계의 판축(판자를 측면에 대고 성을 쌓는 방법)과 고구려계의 석축(판축외면에 돌을 쌓고 자갈로 다지는 방법)이 혼합된 형태로 보여 고구려와의 관련이 깊다』고 밝혔다.

 더욱이 기둥을 받치는 주춧돌이 배수를 고려한 형태로 만들어져 그 제작시기를 삼국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게 한다는 것이다. 또 성터 지반의 아래층에서 출토된 붉은 벽돌과 기와는 고구려 건축물에서 전형적으로 나타나는 것으로 고구려 유적의 증거로 보고 있다.

 성터 안쪽에서 둥그런 봉분형태로 발견된 적석총은 오랜 세월을 거치며 무너져 내리긴 했지만, 3∼4단으로 이루어진 기단 흔적이 뚜렷하여 중국 길림성 집안일대에서 무더기로 발견된 고구려 무덤과 유사한 형태를 보인다.

 특히 적석총에 사용된 돌의 형태와 흙의 사용여부에 따라 시기를 추정할 수 있는데, 다리강가의 경우 흙을 사용하지 않고 모난 돌로 무덤벽을 쌓은 형태이므로 BC2∼AD1세기때 만든 것으로 보고 있다.

 조사단의 학술대표로서 2년전부터 다리강가 지역의 전설과 설화를 수집한 주채혁교수(강원대)는 『동몽골 지역과 우리나라는 기원설화, 건국설화, 민속 등이 매우 흡사하여 고대부터 깊은 관련을 지닐 것으로 보았다. 이번 조사과정에서 고려인의 후예가 발굴하러 왔다는 말에 무척 놀라는 주민들의 모습을 보고, 이 지역이 고구려땅이라는 확신을 가졌다. 유적과 유물의 발굴로 잃어버린 역사를 찾게 되었다』고 흥분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손단장은 『이번 발굴은 전체 유적 중 일부만을 대상으로 했기 때문에 고구려인의 활동내용의 전모를 밝힐 수는 없지만, 고구려인의 숨결을 확인할 수 있었다. 돌벽이 무너질 우려가 있어 발굴을 중단한 적석총을 집중적으로 조사하여, 이 곳이 고구려 성터임을 증명해주는 결정적인 증거들을 보완해 나갈 계획』이라며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학계는 군사적·경제적 요충지인 이 지역이 고구려와의 관계가 있는 것으로 밝혀진 것을 매우 놀라운 일로 받아들이면서 앞으로 미발굴지역의 집중적인 조사로 체계적인 정리를 해야 한다고 지적하고 있다.

 윤내현교수(단국대)는 『이번 유적 발굴지역은 고구려의 영향하에 있었던 곳으로 밝혀진 흑룡강 상류로부터 약 2백 떨어진 곳이다. 지금까지 고구려땅으로 추측했던 이 지역에서 유적발굴로 고구려 영토확장 만이 아니라 우리문화가 몽골지역에 전파된 경로를 연구하는 데도 큰 도움이 된다』고 강조했다.【다리강가(몽골)=최진환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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