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원칙 「사안별처리」 단견 탈피/통일대비 “민족포용력” 평가도 정부는 27일 국내에 불법체류중인 북한 국적 동포들의 영주 귀국을 허용하기로 결정, 오랜 「무원칙」의 타성을 과감히 벗어났다. 정부의 이번 결정은 정치적 ·현실적 고려를 앞세우던 단견을 탈피, 법률적 정당성과 인도적·민족적 대의를 따른 획기적 조치로 평가할 만 하다.
고난의 민족사와 함께 한이 맺힌 삶을 의탁하러 찾아 온 조국에서 외면당한채 서러운 나날을 살고 있는 이영순(55) 한영숙씨(51·이상 본보 8월26일자 보도) 등 북한 국적 동포들의 사연은 정부의 「무원칙한 대응」의 실상을 여실히 드러냈다.
정부는 최근 벌목공으로 위장귀순한 박문덕씨(54)의 귀순을 허용하기로 결정하기까지, 여러 경로로 입국하는 북한 국적자들을 처리하는 일관된 기준 없이 이른바 「사안별 처리」를 해 왔다.
정부는 북한에서 군사분계선을 넘어 탈출하거나 제3국을 거쳐 오는 북한 주민은 예외없이 귀순동포로 처리, 영주허가와 함께 정착금 지원등 보호조치를 하고 있다. 또 러시아 북한벌목장을 탈출, 제3국 선박등에 몰래 숨어 들어오는 북한 노동자들도 귀순자로 처리하고 있다. 지금까지 이렇게 귀순에 「성공」한 북한 벌목공은 22명이다.
그러나 같은 북한 벌목공들도 일단 탈출해 러시아나 중국에서 숨어 지내며 우리 공관등에 망명을 요청하는 경우 쉽게 귀순을 허용하지 않고 있다. 러시아 현지 벌목공들과 동포들에 의하면 우리 공관은 귀순을 희망하는 벌목공들과의 면담조차 거절하는 사례가 많다. 국제사면위원회 한국지부장 허창수신부(독일인)는 『북한 탈출자를 북경주재 한국대사관에 데려갔으나 면담을 거절당했다』고 증언했다. 이 때문에 귀순 희망자들과 이들을 도우려는 관계자들은 『정부가 벌목공 대책을 국민들에게 보여주는데 필요한 최소한의 인원만을 받아 들이고, 나머지는 귀순자체를 달가워하지 않고 있다』고 비난한다.
중국에 살고 있는 북한 탈출자와 북한 국적자들에 대한 정부의 처리방식은 이같은 「기피」자세를 한층 두드러지게 보여 주었다.
정부는 북한 국적 중국 동포들에 대해서는 독립유공자와 후손들을 제외하고는 원칙적으로 영주 귀국을 허가하지 않았다. 『대북관계를 고려해야 한다』는 명분을 내세웠지만, 5만여명으로 추정되는 중국내 북한 국적 동포들이 대거 영주 귀국하는 사태에 대한 우려가 크게 작용했다. 여기에는 『이미 수십년간 중국땅에서 그런대로 살아온 동포들까지 좁은 땅에 몰려 오도록 허용할 필요가 있겠느냐』는 발상이 작용했던 것이다.
북한 국적 중국 동포들에 대한 처리도 일관성이 없었다. 84년 귀국한 홍경표씨(77·본보 8월27일자 보도)는 7년만에 영주허가를 받았고, 강원 화천이 고향인 이영순씨는 강제퇴거명령을 받았다가 소송이 확정될 때까지 시한부 체류가 허용됐다. 상해 출신인 한영숙씨는 서울 출신 부모의 호적에 이름을 올리고 주민등록증까지 받았다가 「직권말소」돼 강제퇴거 대상이 됐다.
64년 북한을 탈출, 지난해 북경주재 한국대사관이 발급한 여행증명서를 갖고 귀국해 영주허가를 신청했다 거부당한 김재흥씨(58·가명)와 「위장 벌목공」 으로 귀순이 허가된 박문덕씨의 경우를 비교하면 「무원칙」은 극명해 진다. 75년 북한을 탈출한 박씨는 91년 중국 국적으로 위장해 입국했다가 적발돼 강제출국당했었다.
이같은 사안별 「선별 처리」는 『국민적 관심이 쏠리는 경우에는 영주허가를 하고 나머지는 외면, 법원칙과 인도적 대의를 무시하고 있다』는 비판을 낳았다. 이제 정부는 국내에 있는 북한 국적자들만이라도 영주귀국을 허용키로 해 민족 통일의 대업을 앞둔 정부에 요구되는 포용력과 민족적 비전을 얼마간 제시했다고 할 만 하다.【정희경기자】
◎“북 탈출후 중국 체류한 것이 귀순자와 무엇이 다릅니까”/북 국적 중 동포 김재흥씨 경우/「반혁명」 옥고뒤 두만강 건너/찾아온 서울 “불법체류” 낙인
북한 국적 중국동포 김재흥씨(58·가명)는 지난해 4월 북경의 한국대사관에서 「국적 KOREA」라고 찍힌 여행증명서를 받아 가족과 함께 서울에 왔다. 북한의 핍박을 피해 중국으로 탈출한지 32년만에 다시 밟은 조국 땅이었다.
그러나 조국에서의 자유로운 삶을 꿈꾸던 김씨는 언제 강제퇴거당할지 모르는 불안을 안은채 서울 변두리에 숨어 막노동으로 고달픈 삶을 살고 있다.
함남 함흥에서 태어난 김씨는 조부가 일제시대 면장을 지내 「반동」의 낙인이 찍힌채 성장했다. 자신도 18세때인 54년 반노동당 학생조직에 가담했다가 붙잡혀 죽을 고초를 겪다가 다행히 만 18세가 안돼 특별사면조치로 간신히 목숨을 건졌다.
함흥 화학설비 공장에 배치돼 일하던 61년 부친이 김일성을 비방하는 말을 했다가 「반혁명 분자」로 투옥되는 바람에 김씨도 두만강유역 무산광산 강제노동수용소에서 죽을 고생을 했다. 3년만에 풀려났으나 감시 대상이 된 김씨는 64년 3월 북한 탈출을 결심, 부인과 두 아들을 데리고 두만강을 건넜다.
길림성 연길시에 정착, 전기 용접공으로 일하던 김씨는 79년 KBS사회방송의 이산가족찾기 프로그램을 통해 한국의 친척들과 연락이 닿아 초청장을 받았다. 그러나 중국 여권을 받을 수 없어 한국행의 꿈을 이룰 수 없었다.
13년의 세월이 다시 흐른 92년 북경에 한국 대사관이 개설되자 김씨는 여행 허가서 발급을 신청, 지난해 3월 3개월 기한의 여행허가서를 받았다. 「국적 KOREA」라고 찍힌 이 대한민국 여행 허가서를 김씨는 「당신은 한국인」이란 증명서로 여겼다. 다음달 동갑의 부인·장남(32)과 함께 고국을 찾은 김씨는 곧장 영주 허가를 신청했으나 거부됐다. 최근 외무부 담당자들은 『곧 정부의 조치가 있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으나 「불법체류자 일제단속」에 전전긍긍해야 하는 처지다.
친척들의 도움으로 서울 변두리에 거처를 마련한 김씨는 아들과 함께 건축공사장 잡부로 일해 생계를 잇고 있다. 그는 『정부가 시베리아 벌목공등은 귀순을 허용하면서 목숨을 걸고 북에서 탈출한 우리 가족을 외면하는 이유는 뭐냐』고 답답한 심정을 토로했다.【장학만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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