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좋게」영주허가 북국적 중국교포 홍경표씨/임실출생… 일제피해 42년상해로/84년입국… 「빨갱이」시선속 설움/중 여인과 낳은 외아들 귀국불허 또다른 「이산」비극 수십년간 그리던 조국에 돌아온 북한 국적 중국교포 가운데는 홍경표씨(77)처럼 「운좋게」 영주허가를 받아 눌러 사는 이도 있다. 그러나 그도 정부의 「무원칙」 때문에 이 땅에서 갖은 고초를 겪어야 했다. 그리고 자신은 겨우 조국 땅 한 귀퉁이에 몸을 붙였지만 중국에 남은 혈육들과는 국적이 남과 북으로 갈린채 또 다른 「분단」의 비극속에 살고 있다.
전북 임실의 빈농에서 태어난 홍씨는 일제하 서울 종로에서 포목상 점원으로 일하며 YMCA 야학에서 청운의 꿈을 키웠으나 42년 일제의 징집령을 피해 중국 상해로 달아 나면서 인생유전의 길에 들었다.
상해 부두에서 막노동으로 연명하던 그는 광복직후 귀국 시기를 놓쳤다가 졸지에 「북한 공민」이 됐다. 중국과 북한은 중국에 남은 조선인들을 「양자강 이남 거주자는 북한, 양자강 이북은 중국 국적」을 부여하기로 협약을 맺었고 홍씨도 고향이 있는 남한으로는 돌아갈 수 없는 신세가 됐다.
그는 생계를 위해 침술을 배우고 중국 여인과 결혼, 1남2녀를 두었다. 그런대로 괜찮은 생활이었지만 중국인들의 유형무형의 핍박속에 세월과 함께 깊어지는 망향의 설움으로 남몰래 눈물지으며 거의 한 평생을 살았다.
67세 되던 84년 KBS 「이산가족찾기」방송의 열풍속에서 그도 서울에 사는 장조카 성국씨등 친척들을 찾았다. 성국씨의 초청장을 받아든 그는 중국 당국의 여행허가서를 받아 곧장 꿈에도 그리던 조국땅을 밟았다. 『가족들도 데려와 고향에 뼈를 묻겠다』는 「수구초심」을 간직한 채였다.
부모 형제들은 이미 세상을 떠난 뒤였으나 조카등 친척들은 그를 진심으로 반겨 주었다. 그러나 고향을 찾고 친지들을 만나는 「꿈 같은」시간도 잠시, 그는 중국으로 돌아가야 하는 처지였다. 고향 호적부에 이름까지 버젓이 남아 있었지만 정부는 그에게 올가미처럼 씌워진 「북한 국적」을 이유로 영주 귀국을 허가하지 않았다.
애타는 호소도 소용없이 결국 그는 「출국명령」을 받고 7년간 숨어 살다시피했다. 장조카가 마련해 준 경기 안산의 9평짜리 연립주택 지하 단칸방에 몸을 붙이고 무허가 침술업으로 근근이 생활했다. 중국의 두 딸이 가끔 찾아와 중국으로 돌아 갈 것을 권했으나 홍씨는 끝내 고개를 저었다. 북한 국적을 가졌다는 이유로 「빨갱이」라고 의심하는듯한 주위의 시선과 늙은이 혼자 지내는 생활이 힘겨웠지만 고향에 뼈를 묻겠다는 결심을 꺾을 수는 없었다.
홍씨는 귀국 7년만인 91년 마침내 영주허가를 얻어내 주민등록증까지 받았다. 외무부와 법무부 등에 수십통의 탄원서를 보내는 등 끈질긴 「투쟁」 끝에 얻은 결실이었다. 그는 『이국에서 보낸 40년 세월보다 돌아온 조국에서의 지난 7년간이 한층 서럽고 야속했습니다』라고 말한다.
홍씨는 이제 소원대로 고향에 뼈를 묻을 수 있게 됐다. 그러나 그는 혈육과 다시 단절되는 이산의 아픔을 안고 여생을 살아야 하는 처지다. 상해 복단대 불문과를 나와 스위스에 유학중인 외아들(32)의 한국 국적취득신청을 냈으나 『한국에 거주한 적이 없어 대한민국 국민으로 볼 수 없다』는 이유로 거부됐다. 이 땅에서 며느리를 얻어 손자를 보겠다는 노인의 소박한 「욕심」은 채워질 수 없는 상태다.
홍씨는 『애비는 한국인, 자식은 북한인으로 남겨 둘 수 밖에 없는 것입니까』라고 허탈한 한숨만 내쉬고 있다.【박천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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