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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좁은땅」170만 병력 끝없는 대치(광복 분단 50년: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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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좁은땅」170만 병력 끝없는 대치(광복 분단 50년:3)

입력
1994.08.2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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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남한적화 강한집념 전쟁·숱한 도발/군비증강에 온힘… 최근엔 핵무장 시도/위기의식 남도 국방비 계속증액… 양측모두 발전 걸림돌로 한반도는 세계에서 가장 밀도가 높은 군사력 집결지대다. 1백55마일 군사분계선을 사이에 두고 미군 4만여명을 포함한 1백70여만명의 대병력이 팽팽한 긴장상태를 유지하고 있다. 중국군 3백여만명, 러시아극동군 69만여명, 일본자위대 25만여명. 이들 나라와 견주어 22만㎢의 좁은 땅에 얼마나 많은 군대가 있는지를 실감할 수 있다. 40여년 계속된 남북의 경쟁적 첨단무기 도입과 개발은 무력대결 태세를 더욱 날카롭게 만들었다.

 국토분단과 6·25전쟁을 가져왔던 동서냉전의 구조는 소련과 동구권의 몰락, 중국의 개방등으로 이미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그러나 한반도는 여전히 냉전 속 활화산이다.

 분단과 국가수립 이후 줄곧 남한은 북한이 노리는 혁명과 적화통일의 대상이었다. 북한은 한반도 적화통일이란 기본목표를 이루기 위해 50년 동안 군사우선정책을 펴왔다. 그들은 소련의 지원등으로 전쟁을 일으켰으며 휴전뒤에도 대남우위의 군사력 증강과 전쟁준비를 계속 추진해 왔다. 전사회를 병영화한다는 노선이었다. 여기에는 김일성 유일지배체제 보존과 부자세습체제 구축이라는 정권안보의 전략이 바탕을 이루고 있었다.

 남한의 체제와 사회구조는 북한에 대한 방어적 정신상태에 의해 지배되어 왔다. 북한의 위협은 분단 50년을 관통하며 권위주의 독재와 군사정권을 정당화시키는 명분으로 이용되기도 했다. 군사공약의 중요성 때문에 미국의 정치간섭과 미군의 주둔이 허용됐다.

 남한은 국토와 체제방위를 위해 군사력 증강을 계속해 왔다. 6·25전쟁때 초반패배를 경험한 탓에 불안하지만 힘에 의한 평화유지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전쟁억지를 위한 군비증강이었다.

 북한의 군사력 및 전략은 스탈린주의의 전쟁개념에서 비롯됐다. 북한은 소련의 도움으로 인민군을 만들었으며 소련제 무기로 무장을 했다. 그들은 1950년 20만명의 병력으로 대남 침공을 감행했으나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 휴전뒤 북한은 무력에 의한 공산화를 사실상 포기하고 반제·반봉건 민주주의 혁명노선을 채택하여 위장평화공세와 지하당 공작에 역점을 두기 시작했다. 이러한 전환은 경제복구와 군비재건을 위한 시간을 벌기 위해서였다. 56년에는 8만명의 병력이 감축되는등 50년대 후반의 군사비 지출은 국가예산의 5%  수준에 머물렀다.

 북한은 60년대에 접어들면서 본격적으로 군사력을 증강하기 시작했다. 62년 12월 당 중앙위원회 총회에서 전인민의 무장화, 전국토의 요새화, 전군의 간부화, 무기의 현대화등 군사정책의 결정판인 4대 군사노선을 채택했다. 중국군의 완전철수, 흐루시초프의 스탈린 격하에 따른 대소련 단절전략등은 주체사상을 기반으로 한 국방자위정책으로 이어지면서 군비증강을 가져왔던 것이다. 전후복구를 어느 정도 마무리했다는 자신감도 그 원인의 하나였다.

 그 결과 62년에 예산의 2.6%에 지나지 않던 북한의 군사비는 66년에 10%, 68년에는 32.4%를 기록했다. 이 동안 북한은 재래식 기본무기를 크게 늘렸으며 이를 토대로 남한에 있어서 혁명역량강화라는 혁명전략을 출발시켰다.

 68년의 1·21 청와대습격기도사건, 미국 푸에블로호 동해상 납치사건과 69년 미국 EC121 정찰기 격추등의 군사적 모험주의는 이러한 전략의 일환이었다.

 70년대와 80년대에도 북한의 군비증강은 꾸준히 지속됐다. 하지만 방위산업과 중공업 중심의 구조, 폐쇄적인 자급자족체제등에서 빚어진 심각한 경제난은 그들의 군비증강 노력을 곤경에 빠뜨렸다. 최근 미사일과 화학무기의 집요한 개발은 자체 경제능력 저하에 따른 군비부담을 줄이면서 전력상승만은 유지하겠다는 고육책으로 평가되고 있다. 최악의 경제상황속에서도 부자 권력승계체제의 유지를 위해서는 군사적 우위확보의 군비증강정책은 필수적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북한은 바로 이러한 전환기의 군사정책 대안으로 핵개발을 착수했다. 그래서 결코 핵을 포기할 수 없는 것이다.

 이러한 북한에 맞서 남한도 치열한 군비경쟁을 벌여왔다. 50, 60년대 남한의 군사력 증강은 거의 미국의 원조에 의존했다. 55∼60년 6년 동안 군사비총액은 1천5백27억원이었으며 이중 58·5%인 8백96억원이 미국 지원이었다.

 남한의 자주적 전력증강은  북한보다 12년이나 늦은 74년부터 시작되었다. 그때까지 열세였던 경제력에서 자신감을 가졌기 때문이었다. 미국 카터정부의 철군정책도 절박감을 조성했다. 북한전력이 절정을 이룬 시점이었다.

 남한은 그 이후 10여년간 GNP의 6%를 국방비에 들였다. 80년도 남한의 국방비는 2조8백억원, 북한은 2조6천억원이었다. 그러나 88년엔 남한 5조5천억원, 북한 3조5천억원으로 상당한 차이가 벌어졌다. 경제력의 차이는 군비경쟁 구조에 결정적 변화를 가져왔던 것이다. 6·25 당시 북한의 절반에도 못 미치던 남한의 군사력은 그동안 북한전력의 70% 수준을 확보하게 되었다. 실질적으로 대등한 전력이라는 평가도 나오는 단계에 있는 것이다.

 이같은 군비경쟁을 거치면서 남북한 모두는 생존과 발전에 큰 타격을 입었다. 강력한 군비증강만이 살길이라고 믿어 경제규모에 비해 지나친 군비 지출을 했기 때문이었다. 군사대결구조는 북한에 병영체제, 남한에는 군사정권을 낳았다. 군사문화가 주민의 정서와 사회구조를 오염시켰다.광복 50년은 군사적 측면 때문에 끊임없는 갈등과 대결을 낳은 분단의 세월이었다.【손태규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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