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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 관리·낭인 「합작만행」 첫 물증/명성황후시해 칼 발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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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 관리·낭인 「합작만행」 첫 물증/명성황후시해 칼 발견

입력
1994.08.2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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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행자백 문서도 찾아/“일 수뇌 사실인지” 반증/칼집엔 “…단칼에 살해했다” 문구·시해범호 새겨 1895년 주한 일본공사관원들과 낭인들이 명성황후(민비)를 시해할 때 사용한 것으로 추정되는 칼이 국내학자에 의해 발견돼 최초로 사진이 공개됐다. 또 민비를 시해한 낭인들을 조사한 일본 히로시마(광도)재판소 구사노(초야)검사장이 범인들로부터 민비시해의 진상을 자백받은 사실을 요시가와 아키마사(방천현정)사법대신에게 보고한 전문도 발견됐다.

 한일관계사 전문가인 최서면국제한국연구원장(67)은 22일 『광복50주년과 민비시해 1백주년을 앞두고 최근 자료수집차 일본에 갔다가 민비시해에 사용된 칼과 구사노검사장의 전문을 발견했다』고 밝혔다.

 일본 규슈(구주)지방의 한 신사에서 발견된 이 칼은 길이 1백20가량으로 칼집에는 「일순전광자로호 (단칼에 늙은여우를 살해했다)」라는 문구와 함께 시해범의 하나인 후지가쓰 아키(등승현)의 호(몽암)까지 새겨져 민비시해에 사용됐음을 분명히 해주고 있다.

 학계에는 민비시해사건이 일본주한공사 미우라 고로(삼포오루)가 독일 프랑스 러시아의 삼국간섭 이후 친러정권으로 돌아선 민비정권을 전복키 위해 1895년 10월8일 상오7시께 공사관원들과 낭인들에게 지시를 내려 저질렀다는 사실만 알려져 있을뿐 민비를 시해한 직접증거물인 칼이 발견되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당시 일본내 최고의 명인이었던 나가사키(장기)의 다다요시(충길)가 제작한 이 칼은 후지가쓰가 시해사건 직후 대륙침략 낭인들을 다수 배출한 규슈지방의 한 신사에 헌납해 지금까지 보관돼온 것으로 밝혀졌다.

 후지가쓰는 1895년 미우라가 주한공사로 부임하면서 개인비서자격으로 데리고온 낭인. 시해사건후 다른 범인들과 함께 히로시마재판소에서 조사를 받았으나 증거불충분으로 무혐의처리돼 한동안 절에서 은거하다 학교를 세워 교육자로 활동했으며, 해방직후 사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편 일본도서관에서 발견된 구사노검사장의 전문에는 『민비시해 하수인을 찾던중 히라야마 이와히코(평산암언) 후지가쓰등 13명이 「민비를 살해했다」고 자백했다』는 내용이 실려있어 당시 일본수사당국과 일본정부 수뇌부는 후지가쓰등이 민비시해범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음을 입증하고 있다.

 특히 이 전문에는 『히라야마 후지가쓰등이 범행당시 「민비처럼 보이는 여자가 많아 확인할 방법이 없었다. 모두 옷을 벗겨 유방을 살펴보고 명성황후 나이인 44세가량으로 보이는 여자를 칼로 베어 살해했으며, 이를 제지하다 일본인 관리의 총을 맞고 쓰러진 궁내부대신 이경식을 다시 칼로 베었다」고 자백했다』는 내용도 들어있어 일본 공사관원이 범행에 직접 가담했음이 드러났다.

 최원장은 『이번에 발견된 칼과 전문은 민비시해사건이 주한공사 관원과 일본인 낭인들의 합작에 의해 저질러졌음을 명백히 입증하고 시해당시 상황을 생생하게 파악할 수 있는 자료』라며 『일본인들은 이 칼을 주권을 강탈키 위해 한 나라의 황후를 살해한 비도덕적인 역사를 반성하는 상징물로 여겨야 할것』이라고 말했다.【김성호기자】

◎학계 반응/“고증 남았지만 사건 진상 파헤칠 계기”

 신용하교수(서울대)는 『우선 이 칼이 당시 사건을 담당했던 히로시마 지방재판소에 의해 시해용 칼로서 증거물로 채택됐는지 확실한 고증을 거쳐야 한다.  이를 통해 일본정부가 이 사건을 은폐하려 했던 만큼 신사에서 확보하게 된 과정과 기록을 살펴 진상을 상세히 밝히는 계기가 될 수도 있다』고 말했다.

 82년부터 이 사건을 추적하여 92년에 「명성황후 시해사건」(민음사간)이란 책을 공동으로 냈던 이광린학장(중부대)은 『당시 사건에 가담했던 낭인들이 구주출신인데, 칼이 그 지역의 신사에 헌납돼 보관돼 왔다는 것은 「시해용 칼」일 가능성을 뒷받침해주고 있다』고 말했다.

 최문형교수(한양대)는 『시해 계획단계부터 일본정부가 깊이 관여했다는 사실은 외교문서, 내부보고서 등을 통해 이미 확인됐다.이제는 시해의 전말이 드러난 만큼 이로부터 역사적 교훈을 찾아나가는 작업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명성황후 시해사건 전말/99년전 궁궐서 자행된 잔혹한 범행… 범인들도 형식적재판 거쳐 모두 석방

 99년전인 1895년 10월8일 상오7시 경복궁. 일본군 수비대 1백40여명과 일본 낭인들이 뒤섞인 무장행렬이 궁궐로 침입하기 위해 궁궐시위대와 총격전을 벌여 궁궐은 느닷없이 소란스러워졌다.

 총격전이 한창 치열할 무렵 이들과 별도로 은밀히 담을 넘어 왕궁에 난입한 낭인 무리들은 별다른 저항을 받지 않고 명성황후(1851∼1895년)가 거처하던 건청궁으로 들어갔다. 그들은 궁녀 등 30∼40명을 난폭하게 땅 바닥으로 내몰았다. 궁녀들 틈에서 영문도 모른 채 떨고 있던 명성황후는 그를 확인한 낭인들에 의해 옷이 벗겨지고 가슴에 칼을 맞았다. 처참하게 쓰러진 황후는 다시 궁궐 우물에 처박혔다가 판자 위에 실려 궁궐 뒤에 있던 사슴 사냥터로 옮겨졌고 여기에서 불태워졌다.

 당시 국제적인 미궁사건으로 처리된 「명성황후 시해사건」은 조선 왕조의 권위와 존엄을 상징하던 궁궐에서 이렇듯 어처구니없는 만행으로 저질러졌다.

 이 사건은 일본이 조선에 대한 독점적인 지배권을 확보하기 위해 명성황후를 제거한 것이다. 명성황후는 삼국간섭(1895년)을 계기로 조선에 대한 영향력을 확대한 러시아의 「조선 통로」가 되고 있었다. 삼국간섭은 러시아, 독일, 프랑스가 일본이 청일전쟁의 결과로 얻은 랴오둥반도를 청나라에 돌려주게 한 사건이다. 

 미우라 신임 일본공사가 부임한 지 37일 만에 일어난 사건은 열강의 이해가 첨예하게 대립했던 조선에서 외교적 문제를 야기할 사건을 일개 공사가 계획할 수 없다는 점 때문에 일본 정부의 사전 모의설이 사건 당시부터 대두됐었다.

 이듬해 1월 시해를 지휘한 시바 시로(시사랑) 등 낭인들이 형식적인 재판 끝에「증거불충분」을 이유로 전원 석방되면서 이 사건은 역사의 어두운 기억 속으로 물러났다. 미국 하버드대와 펜실베이니아대에서 경제학을 전공한 시바는 후에 중의원 의원을 지냈다.【서사봉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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