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동주 고향… 교회는 폐가로, 학교엔 주춧돌만 아리랑고개를 넘은 이민자들의 고달픈 행로는 해란강지류 륙도하를 따라 만주내륙으로 가는 북상길로 이어진다. 강을 낀 너른 들녘에 50호 안팎의 작은 마을들이 올망졸망 흩어져 있다. 정처없이 걷다 논밭을 일굴만한 터를 만나면 지친 몸을 주저앉히고 보따리를 풀어낸 흔적들이다. 명동촌도 그런 마을이다. 암울한 식민지시대를 앓으면서도 별처럼 순결한 영혼인 채로 숨져간 시인 윤동주의 고향이며 독립운동의 전초기지로 우리 가슴속에 선명히 각인된 명동촌은 초입에 세워진 엉성한 표지판만 아니라면 그냥 지나치기 십상인 평범한 모습이다. 퇴락한 농가의 골목 사이로 눈꼬리 처진 누렁이가 어슬렁거리고 뜨락에서 담배모판을 다듬는 아낙의 손길도 한가로운 전형적 농촌일 뿐이다. 마을이름에도 독립의 염원을 담아 동쪽을 밝힌다는 뜻으로 지은 명동촌의 그 치열한 의기마저 세월에 깎이고 지워진 것일까.
마을 초입의 명동학교 터에서도 쓸쓸한 공허감만이 느껴진다. 여기저기 주춧돌로 쓰였을 법한 돌이 뒹굴 뿐 숱한 민족지사들이 독립의 꿈을 키우던 배움터의 흔적은 어디에도 남아있지 않다. 한때는 담배밭으로 일궈지기도 했다는 1백여평 남짓한 학교터는 개구쟁이들의 놀이터, 가을날 볏가리 따위를 말리는 공터에 지나지 않는다. 간혹 미국 캐나다등지에서 노동창들이 찾아와 무상한 세월을 추억하곤 한다고 주민들이 전한다.
안쪽에 있는 명동교회도 비슷하다. 한동안 정미소로 사용되던 교회당은 전혀 쓸모없는 폐가로 변해 풍상에 쓰러져가고 있다. 민족이라는 대의로 기독교신앙을 포용했던 신앙공동체이자 민족단체였고, 뿌리뽑힌 이주민들의 생활공동체였던 곳은 이제 이끼 낀 기와가 부스러지고 흙담 안쪽 여덟칸 공간도 무너져앉은 마룻바닥으로 을씨년스럽다.
교회건물 앞에는 명동촌을 건설한 규암 김약연선생(1868∼1942년) 기념비가 교회를 세울 때 심었다는 미루나무 두 그루를 양편에 거느리고 서 있다. 윗머리가 떨어져나간 기념비는 흉한 모습이다. 오래돼 저절로 허물어진 것이 아니라 문화혁명이라는 허망한 이념의 광풍이 휩쓸고간 흔적이다. 당시 홍위병들은 부르주아의식 타도와 함께 민족주의의식 척결을 내세우며 기념비를 부수려 달려들었다. 학교건물도 그때 피해가 났으며 조선족 상당수도 이유없이 반동으로 몰려 혹독한 옥살이를 겪어야 했다. 결국 명동학교는 복구되지 못한채 흔적도 없이 사라졌으나 규암기념비는 마을사람들이 숨겨둔 덕분에 지난 90년 상한 모습으로나마 다시 제 자리에 서게 됐다.
윤동주(1917∼1945년)의 생가터는 명동교회 옆에 있다. 소학교를 졸업하고 용정의 은진중학으로 진학해 이사했던 15세때까지 살던 곳이다. 81년에 헐려 담배밭 한가운데 주춧돌 몇개만 남은 터에서는 올봄부터 생가복원작업이 이루어지고 있다. 마을주민들은 윤동주의 생가가 기와를 얹은 열칸짜리 본채와 별채가 딸린 자 형태였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규암의 조카로 심성 여린 소년이었던 윤동주는 명동촌주민 누구나 서슴없이 꼽는 마을의 자랑이 되어 있다. 대부분의 한국인들에게도 명동촌은 윤동주의 고향이어서 친숙한 이름이다. 중국당국의 관광규제가 많이 풀리면서 명동촌은 백두산 근참길의 한국관광객이 반드시 거치는 곳으로 자리잡아가고 있다. 그러나 이제는 어렴풋한 흔적으로만 남은 평범한 농촌마을 명동에서 과연 숙연한 의미 한 자락이나마 붙들 수 있을는지.
내년에 마을 뒤편 구릉을 가로질러 뚫릴 용정―삼합 4차선 산업도로에 주민들은 큰 기대를 걸고 있다. 북한의 회녕―청진 도로와 연결돼 명동촌이 앞으로 한국과의 직교역로에서 요충을 담당하게 되리라는 희망 때문이다.
◇특별취재반/권주훈부장대우(사진부)/이준희기자(사회부)/이재렬기자(기획취재부)
◎명동촌의 역사/1899년 김약연선생 등 이주해 세운 마을/독립운동가 배출 명동학교는 민족교육 본산
만주독립운동은 무장투쟁과 교육이라는 두 축으로 이루어졌다. 무장투쟁의 상징이 청산리와 봉오동이라면 민족교육의 현장으로 명동촌이 있다.
명동촌의 역사는 김약연이라는 선각에 의해 시작된다. 그는 1899년 관북실학의 대표격이었던 김하규(문익환목사의 외조부), 문치정, 남위언등 「종성오현」과 함께 식솔을 이끌고 이곳으로 와 사재로 임야 수백정보를 사들여 학전을 일구고 규암재라는 서당을 열었다. 규암재는 1908년 이상설이 세운 최초의 근대학교 서전서숙이 폐교되자 명동서숙으로 이름을 바꿔 신교육을 수용하기 시작했다. 이후 명동서숙은 신민회의 정재면목사가 참여하면서 명동학교로 변신, 애국교육의 본산으로 자리잡았다. 학교옆에 교회도 세웠다.
명동학교와 명동교회 설립은 규암의 놀라운 결단 덕분이었다. 정목사가 신식교육을 가르칠 교사들을 공급하는 대신 기독교 수용을 요구하자 규암은 마을원로들과 숙의끝에 이를 받아들였다. 유학자에서 기독교인으로 세계관 자체를 바꾼 것이다. 민족교육이라는 대의를 위해서였고 독립이념의 모색이 전통유학만으로는 부족하다는 판단 때문이었을 것이다. 규암 자신은 1929년 평양신학교를 졸업, 장로교목사가 됐다.
1919년 3·13만세운동 이후 명동학교는 북간도 대한국민회의 본부가 됐고 졸업생들은 명월구등지의 무관학교를 거쳐 안무의 국민회군, 홍범도부대의 대한독립군에 참여하거나 신문 발간, 군자금모집에 종사했다. 「흰 뫼(백두산)가 우뚝코 은택이 호대한 한배검(단군)이 그치신 이 터에 그 씨와 크신 뜻 넓히고 기르는 나의 명동…」 명동학교의 교가처럼 민족의 동량이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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