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9일 하오 전경련주최로 열린 30대그룹 기조실장회의는 무언의 약속아래 진행됐다. 「공정거래법개정안에 대해서는 말조심 하기」―. 어느 누구도 주동하진 않았지만 참석자들은 모두 이 「약속」을 충실히 따랐다. 그래서 30대그룹의 출자총액한도 축소를 골자로 하는 공정거래법개정안을 공격하기 위해 예정보다 앞당겨 개최한 이날 회의에서 재계는 정작 하고 싶은 말은 못하고 엉뚱하게 「WTO(세계무역기구)체제하의 우리경제」를 논의하고 돌아갔다. 재계는 요즘 바늘방석에 앉아 있다. 공정거래법 개정안이 입법예고된 직후 기자회견을 통해 『정부가 경제도 모른다』며 정부를 비판했다가 공정위로부터 싸늘한 「경고」를 받은 것이다. 당황한 조규하전경련부회장은 지난주말 과천청사를 찾아가 정부를 무시하는 듯한 재계의 언동을 진사했고 재계의 반대논리를 공론화하기 위해 17일로 예정했던 공청회도 9월1일로 연기했다. 조부회장은 17일 하오 기자회견을 자청, 『재계가 정부에 대드는 것처럼 보였다면 잘못했다』며 자숙의 뜻을 재삼 강조했다.
전경련이 이렇게 쩔쩔매고 있을 때 10대그룹 임원들도 차례로 공정위에 불려가 이번 개정안에 대해 『기본취지에는 동감한다』고 말했을 뿐이다.
재계의 체면이 구겨진데는 정부를 존중하지 않고 「재부」처럼 행세하려 한 스스로의 책임이 크다. 경쟁력강화는 뒷전에 두고 잇속만 챙기려고 서로 엉켜싸우는 듯한 인상을 준 것도 공정거래법 강화문제를 촉발시킨 셈이다.
그러나 재계가 처음부터 좌충우돌한 것은 아니다. 입법예고전 공정위관계자들을 초청, 밤늦도록 토론을 하는 노력도 보였다. 그러나 공정위는 『재벌들은 너무 독식을 좋아해서 그대로 놔두면 안된다』며 냉소적인 태도를 보였다. 전경련의 공격에 노골적인 불쾌감을 표시하고 재계관계자들을 잇따라 소환한 공정위의 행동을 재계가 「위협적」으로 받아들인 것도 당연하다.
결국 이번 논란에서 재계는 스스로 약자임을 인정했다. 재계가 서슬퍼런 정부앞에서 체면도 자존심도 내던져버려 창피를 당했다면 정부는 아직도 우리 경제가 관료들의 감정에 좌우될 수 있다는 사실을 스스로 인정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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