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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위 이야기(장명수칼럼:1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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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위 이야기(장명수칼럼:1710)

입력
1994.08.1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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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민학교에 다니는 조카들 여러 명이 우리집에 와서 주말을 함께 보냈는데,사촌·외사촌 사이인 그애들은 이른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먹고 놀고 이야기하느라고 시끄러웠다. 축구 하고, 자전거 타고, 수박 먹고, 욕조에 물을 가득 받아서 같이 목욕하고,  자정이 넘도록 재잘거리느라고 잠시도 쉬지 않았다. 어느날 저녁 그들은 나에게 이불을 몇 채 달라고 말했다. 『이 더위에 무슨 이불이냐?』라고 내가 묻자 그들은 『빨리 빨리 주세요』라고 재촉했다. 이불을 갖다주고 나서 잠시 후에 보았더니 그들은 모두 머리끝까지 이불을 덮은 채 쥐죽은 듯 한 아이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그 아이는 귀신 이야기를 하는 중이었다. 그 아이도 자기 이야기가 무서운지 얼굴을 덮은 이불자락을 두손으로 꽉 움켜쥐고 있었다. 『얘들아』라고 내가 소리치자 그들은 일제히 『으악』하고 놀랐다. 나는 내가 어렸을 때의 여름밤, 별이 쏟아질 듯 빛나는 밤하늘을 보며 평상위에 누워 누군가가 들려주는 귀신 이야기를 듣던 생각이 났다. 나도 그때 머리카락이 곤두서도록 무서워 변소에도 못갔었지.

 아들을 군에 보낸 친구들은 올 여름을 보내며 이렇게 말하고 있다.

 『에어컨을 틀고도 더워서 잠이 안온다고 야단들인데 그애는 어떻게 견디는지 모르겠어. 낮은 낮대로 밤은 밤대로 얼마나 힘들까. 비좁은 숙소에 그 뜨거운 몸들이 주루룩 누웠으니 오죽 후끈거리겠어』

 『가족이 면회가면 부대앞 여관에서 하룻밤 외박할 수 있는데, 그 허술한 여관방에서 곯아떨어지는 걸 보면 피곤해서 더운 것도 못 느끼나 봐. 집에서 덥다 덥다하고 짜증을 내다가 그애 생각을 하면 죄스러워. 그애가 전화를 하면 네가 고생하는 덕에 엄마가 편안히 지내고 있다는 말이 저절로 나온다니까』

 그러고 보니 덥다고 허덕이는 사람들은 대부분 나이든 사람들이다. 아이들은 귀신 이야기에 누비이불을 머리끝까지 덮고도 더운 줄 모르고, 군에 간 청년들은 열이 펄펄나는 뜨거운 몸으로 잘도 자는데, 편안한 어른들일수록 더워서 못살겠다고 야단이다. 더위 그 자체보다는 더위에 대항하여 날카롭게 곤두선 신경, 참지 못하는 조급함, 냉방장치 없이는 꼼짝 못하는 저항력약화등이 합쳐져 갈수록 더위가 고통스러워지는 것같다. 짜증내지 않고 단순하게 더위를 더위로만 느끼는 이들은 고통이 덜하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나라에서 기상을 측정하기 시작한 1904년 이래 최고의 더위를 기록했던 올 여름도 이제 기울어가고 있다. 내가 그토록 더위를 못참았던 것은 내면의 더위 탓이 아니었을까. 내 조카들, 군에 간 내 친구의 아들들, 들에서 일하는 농부들보다 내가 더 더울 이유는 없었다는 것을 뒤늦게 깨닫고 있다.<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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