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결대치대화의 점철사/「단절의 상처」 씻을 그날은…올해는 한반도가 일제식민치하에서 벗어난지 49해가 되는 해이지만 내년에는 광복50돌을 맞는다. 광복 50년은 분단과 바로 맞물리며 동강난 국토에 사는 같은 민족의 비애를 뼈저리게 한 50년으로 기록될 것이다. 그 광복 50년―분단 50년간 한반도는 결코 겪어서는 안될 남북간의 6·25전쟁을 치렀는가 하면 동서냉전의 최전방에서 이데올로기의 희생양이 되기도 했다. 또 지금도 북쪽에서는 이미 유물화된 공산주의를 맹신하는 정권이 세계에 유례가 없는 세습독재정권을 유지하고 있다. 그런가 하면 남쪽에는 북쪽이 정권지탱의 목적으로 만들어낸 주체사상의 미몽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그러나 그 50년간 갈라진 남북은 엄청난 변화를 체험하면서 점차 통일여건을 성숙시켜 가고 있다. 남쪽에는 30년만에 국민의 선택에 의해 문민정부가 들어섰고 북쪽에서는 절대군주로 군림해 온 김일성의 사망으로 새로운 지배체제를 실험하고 있다. 여기에 남북간에 벌어진 경제적 격차는 그만큼 소모적 대결보다 대화를 통한 통일여건의 성숙을 부추기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격돌과 대화로 점철되어 온 지난 50년간 남북간에 벌어졌던 숱한 사건들중 결코 잊어서는 안될 10대사건을 연도별로 요약해 본다.【편집자주】
○남북대결 약사
분단 50년은 북한에 의해 저질러진 무장침략과 테러, 그리고 냉전속의 대화로 이어져온 세월이었다. 적화통일을 위해 남침을 자행한 북한은 3년간의 동족상잔이 휴전협정 체결로 종식된 뒤에도 적화를 위한 무력사용을 서슴지 않았다. 북한은 60년대에 청와대를 기습했는가 하면 울진, 삼척에 무장공비를 침투시켜 양민을 학살하기도 했다. 70년대 들어 북한은 정치적 목적에서 대화의 제스처를 취하면서도 한쪽에서는 판문점에서 도끼만행사건을 저지르는 야만적인 면을 보였다. 북한은 특히 80년대에는 테러와 대화를 병행하는 수법을 선보였다. 이산가족 고향방문에 합의하는등 각종 남북대화에 응하는 한편으로는 아웅산 테러사건을 일으켜 세계를 깜짝 놀라게 했고 민간인이 탑승한 KAL 858기를 폭파해 무고한 인명을 살상하는 파렴치한 범죄를 저지르기도 했다. 90년대 들어 북한은 남한의 친북인사들을 평양으로 불러들이는등 각종 평화·선전공세를 펴는가 하면 남한이 어렵게 성사시킨 각종 남북대화와 합의사항을 핑계를 대고 취소하기도 했다. 그러나 93년부터 북한은 겹친 경제난을 해결하고 국제적 고립에서 벗어나기 위해 핵문제를 들고나와 미국과 직접 접촉하는등 국제사회의 승인을 받기 위해 온 힘을 다하고 있다.
○남북한 정부수립
45년8월15일 한반도는 일본의 무조건항복과 함께 일제36년간의 압제에서 벗어났다. 그러나 한반도는 해방과 동시에 미국과 소련에 의해 남북으로 분단되는 또다른 비극에 처하게 된다. 자력으로 쟁취한 독립이 아니었기 때문에 체제와 이념이 전혀 다른 2개의 정부가 남북한에 들어선 것이다. 45년10월16일에는 이승만박사가, 11월23일에는 김구주석등 임정요인들이 개인자격으로 입국했다. 김일성은 9월19일 소련군과 함께 북한에 들어왔다. 12월 27일 모스크바에서 열린 미·영·소 3국 외무장관회담에서 5년간의 신탁통치안이 발표돼 남북분단이 기정사실화됐다. 46년6월3일 이승만은 김구등의 반대에도 불구, 남한만의 단독정부수립을 공개주장했다. 북한도 47년 2월17일 인민회의를 개최했다. 결국 48년5월10일 남한만의 단독총선이 실시됐고 8월15일에는 이승만을 대통령으로 한 대한민국정부가 출범했다. 김일성이 전권을 장악한 북한은 9월9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정부를 수립했다.
○한국전쟁 발발
50년 6월25일 새벽 4시. 북한군의 38경비여단과 7개 사단, 1개 전차여단, 수개의 특수독립연대등 병력 11만여명과 2백여대의 전차가 38선을 일제히 넘어 남침을 시작했다. 북한군은 이날 하루동안 의정부 문산등 전선부근의 주요도시를 점령했다. 북한군 절반 정도의 병력을 유지하고 있던 한국군은 속수무책이었다. 이날 밤, 한국정부는 긴급국무회의를 열어 수도를 27일부로 수원으로 옮기기로 결정했다. 6월28일 서울과 춘천등이 북한군의 손에 들어갔으며 전쟁발발 두달여만에 남한국토의 90%를 잃고 말았다. 결국 전쟁은 유엔군의 참전, 중공군의 개입으로 3년 1개월 2일간 계속되었다. 그동안 쌍방은 38선을 각각 3번씩이나 넘나들며 낙동강에서 압록강에 이르기까지, 전 국토에서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이 전쟁으로 적어도 군인 2백50여만명, 민간인 3백여만명이 죽거나 다쳤으며 엄청난 물적 피해가 생겼다. 무엇보다 수 많은 이산가족으로 가족공동체가 무너졌으며 남북간 상호불신과 이질화가 극심해졌다.
○1·21사태
51년7월10일 개성시 고려동 내봉장에서 유엔군과 북한군간에 시작된 휴전회담은 53년7월21일에 끝나고 같은해 7월27일에야 비로소 휴전이 이루어졌다. 휴전협상에 전쟁기간의 3분의 2에 해당하는 만 2년17일이 소요됐던 셈이다. 이 동안에도 전선에서는 밀고 밀리는 접전이 계속됐으며 협상에서는 주로 군사분계선 설정문제나 포로교환문제등이 논의됐다. 당시 우리 정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7월27일 상오10시 판문점의 제1백59차 본회의에서 유엔군측 대표인 해리슨중장과 북한군 대표 남일은 모두 18통으로 된 휴전협정문에 서명했다. 이 협정문서는 문산의 유엔군 전방사령부로 보내졌고 이날 하오1시에 클라크대장이 서명을 마쳤다. 그리고 다시 판문점을 거쳐 평양으로 보내진 협정문서는 북한을 대표해서 김일성이, 중공의용군을 대표해서 팽덕회가 각각 확인서명했다. 같은날 하오10시 각 전선에서는 모든 전투행위가 일제히 정지됐고 한국전쟁은 명분없는 휴전상태를 맞게 된 것이다.
○휴전협정
68년 1월21일 북한 민족보위성 정찰국 직속의 124군부대 무장공비 31명이 청와대 기습을 목표로 서부전선을 넘어 침투, 청와대 옆 자하문까지 진출했다. 특수훈련을 받은 20대 초급장교들로만 구성된 무방공비들은 휴전선에서 침투흔적을 발견한 아군이 비상경계령을 편 가운데도 놀라운 행군속도로 경계선을 뚫고 서울로 들어 와 21일 하오 9시50분 자하문 경찰 경비초소에서 검문경찰병력과 첫 접전, 최규식종로경찰서장을 숨지게 한 뒤 흩어져 달아났다. 이어 22일 상오 2시까지 5명의 무장공비가 사살되고 김신조가 생포됐으며, 31일까지 파주 포천 문산 등지에서 공비 29명이 사살되고 1명은 자폭했다. 우리측도 군과 경찰 민간인 등 1백여명이 사상했다. 생포된 김신조는 『청와대를 까러 왔수다』라는 말로 국민들을 놀라게 했으며, 1·21사태를 계기로 북한의 후방침투에 대비한 2백만명의 향토예비군이 창설됐다.
○7·4공동성명
70년대 들어 냉전의 먹구름이 걷히면서 한반도에도 변화의 물결이 밀려왔다. 남북한이 6·25이후 처음으로 대화의 장에 나서기 시작한 것이다. 70년8월15일 박정희대통령은 북한의 존재를 공식석상에서 처음 인정하고 「선의의 경쟁」을 제안했다. 북한도 71년4월12일 군축, 남북교류등 8개항의 통일방안을 제시하며 응수했다. 이어 71년9월23일 남북적십자 1차 예비회담이 판문점에서 개최됐고 9월22일에는 판문점에 남북한 직통전화가 가설됐다. 특히 72년5월2일에는 이후락중앙정보부장이 밀명을 띠고 북한을 방문했고 5월29일에는 북한의 박성철제2부총리가 역시 비밀리에 서울을 방문했다. 그리고 7월4일에는 역사적인 「7·4남북공동성명」이 서울과 평양에서 동시발표됐다. 7개항으로 된 남북공동성명의 요지는 평화통일3원칙과 남북조절위원회설치였다.
○남북적십자회담
71년 8월12일 대한적십자사 최두선총재가 1천만 이산가족의 혈육상봉을 위해 북측에 이산가족 찾기운동을 제의하자 북측이 뜻밖에 호응, 역사적인 남북적십자회담이 시작됐다. 72년 8월 30일 첫 회담이 열린 남북적십자회담은 서울과 평양을 오가며 7차례 본회담을 가질 정도로 발전했으나 73년 8월 「김대중납치사건」을 이유로 북한측이 일방적으로 중단했다. 80년대 들어 재개된 회담은 3차례의 본회담을 거쳐 85년 9월20일 분단이후 최초의 남북이산가족 고향방문 및 예술공연단 교환공연이 이뤄졌다. 그러나 85년 12월 서울회담을 마지막으로 다시 중단된 뒤 축구교환경기, 탁구·축구단일팀성사등은 이뤄졌지만 이산가족 고향방문은 아직 재개되지 않고 있다. 92년 5월 남북한 고위급회담에서 이산가족 고향방문과 예술공연단 교환에 합의했으나 북한은 핵사찰문제와 이인모씨 송환문제 등을 이유로 지금까지 합의이행을 지연시키고 있다.
○아웅산테러
83년 10월9일 전두환대통령의 버마(현 미얀마) 공식방문중 수도 랑군의 아웅산 묘소를 참배하려던 전대통령 일행을 노리고 북한공작원이 설치한 원격조종폭발물이 터져 대통령의 도착을 기다리던 서석준부총리·이범석외무·김동휘상공·서상철동자부장관등 고위 수행원 17명이 순국했다. 위기를 모면한 전대통령은 서남아·대양주 6개국 순방 일정을 취소하고 급거 귀국, 강경한 「대북응징」을 천명해 한때 일촉즉발의 위기가 조성됐다. 버마당국은 사건직후 달아나던 북한 인민무력부소속 특수부대원 강민철대위와 진모소령등 2명을 체포, 북한의 소행임을 밝혀냈다. 친북한 노선의 버마정부는 11월4일 북한과 외교관계를 단절하고 북한에 대한 승인을 철회했다. 이어 강민철등 2명을 재판에 회부, 사형을 선고했다.
○KAL기 폭파
87년 11월29일 승객과 승무원 1백15명이 탄 바그다드발 서울행 대한항공 858편 보잉 707여객기가 버마영해 상공에서 실종됐다. 정부는 88년 서울올림픽을 방해하려는 북한의 테러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판단, 중간기착지인 아랍에미리트연합의 아부다비 공항에서 내린 일본인 승객 2명을 추적한 끝에 유럽으로 달아나기 위해 바레인에서 여객기를 기다리던 하치야 신이치와 하치야 마유미 등 2명을 검거했다. 검거 순간 독물로 자살한 하치야 신이치는 북한노동당 중앙위원회 조사부직속의 특수공작원 김승일, 하치야 마유미는 김현희로 밝혀졌으며 김정일의 지령에 따라 시한폭탄을 장치해 공중폭파한 것으로 확인됐다. 이 사건은 공중폭파된 기체잔해와 희생자들의 유해 등이 전혀 발견되지 않아 「조작설」을 낳았으나 서울로 호송된 김현희는 범행일체를 자백, 대법원에서 사형이 확정됐다.
○남북고위급회담
분단45년만에 남과 북의 총리가 처음으로 대좌한 남북고위급회담은 90년 9월5일 서울에서 1차회담이 열린 이래 2년여동안 서울과 평양을 오가며 모두 8차례에 걸쳐 진행됐다. 특히 5,6차회담에서는 문서상으로 민족공동체 회복의 단초를 마련했다고 평가되는 「남북사이의 화해와 불가침 및 교류·협력에 관한 합의서」(남북기본합의서)를 비롯해 「한반도의 비핵화에 관한 공동선언」 「남북고위급회담 분과위원회구성·운영에 관한 합의서」가 채택되기도 했다. 8차에 걸친 회담중 북측대표는 연형묵정무원총리였고 우리측은 3차까지 강영훈총리가, 이후 8차까지는 정원식총리가 협상대표였다. 남북간의 현안에 대한 현격한 입장차이에도 불구하고 거듭된 회담을 통해 남북대화사에서 괄목할만한 결실을 맺었던 고위급회담이었지만 결국 팀스피리트훈련을 빌미로 북한이 9차회담을 거부함으로써 92년9월의 8차회담을 끝으로 중단됐다.
○남북정상회담 개최 합의
남북은 94년6월28일 판문점에서 남북정상회담 예비접촉을 갖고 「남북의 양정상은 94년 7월25일부터 27일까지 3일동안 평양에서 정상회담을 갖는다」라는 역사적 합의를 이뤄냈다. 당시 예비접촉에서 우리측의 이홍구통일부총리와 북측의 김용순노동당 대남담당비서는 비관적인 우려를 씻듯 남북정상회담 개최에 전격 합의한 것이다. 이어 29일 열린 실무대표접촉에서도 대표단규모등 세부사항이 원만히 타결됐다.남북정상회담 합의는 6월중순 북한을 방문한 카터전미국대통령에게 김일성이 김영삼대통령을 만나고 싶다는 뜻을 피력하고 우리 정부는 이미 김대통령 취임사에서 남북정상회담을 제의해 놓은 상태여서 쉽게 성사된 면도 있다. 남북정상회담은 북한핵문제로 남북간에 긴장감이 조성된 가운데 사상 처음으로 양측간의 공식협상을 통해 극적으로 성사됐음에도 불구하고 7월8일 김일성이 사망함으로써 이제는 성사여부가 상당히 불투명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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