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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5의 창조적 의미/최상룡(한국논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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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5의 창조적 의미/최상룡(한국논단)

입력
1994.08.1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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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래 전부터 나는 8·15를 「기쁘면서 슬픈 날」이라 불러왔다. 일제 36년간의 식민통치의 멍에에서 해방되던 기쁜 날이면서 미소의 외압에 의한 분할점령으로 국토와 민족과 국가가 두 동강이 나버린 슬픈 날이었기 때문이다. 반세기가 돼가는 지금 8·15는 단순히 일시적인 기쁨이나 오랜 슬픔의 상징이 아니라 다가올 통일한국을 기념하는 날이 되리라는 희망과 신념을 갖게 한다. 그리고 그 통일한국의 주체가 바로 대한민국이라는 역사적 책무와 함께 중압감을 느낀다. 이제부터 8·15는 당해연도의 통일의 준비를 총 점검하는 날이 되었으면 좋겠다. 그래서 나는 8·15를 맞으며 무엇보다도 먼저 통일한국이 추구해야 할 3가지 정치이념에 대해 얘기해 보고자 한다. 첫째는 자유에 대한 확신이다. 자유의 정의는 2백여종이나 된다고 하나 그 모든 정의가 인간의 자기실현 욕구를 전제로 하고 있음은 두 말할 것도 없다. 우리는 그동안 자유에 대한 냉소와 니힐리즘에 익숙해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자유냐 빵이냐고 외치던 궁핍의 시대에는 자유의 주장은 일종의 사치였다. 반공을 최우선 순위에 두었던 냉전시대에는 권위주의와 파시즘의 유혹 앞에 자유주의는 초라하게 보일 때도 있었다. 그래서 자유와 자유주의는 좌우 양쪽으로부터 천대받아왔으며 한때는 자유이념의 공동화 현상이 심각한 수준에 이르기도 했다. 그러나 보라. 그렇게도 도전적이었던 좌의 사회주의체제와 그렇게도 억압적이었던 우의 권위주의체제를 붕괴시킨 내면적 가치가 바로 자유가 아니고 무엇이었던가. 자유는 가끔 적나라한 폭력 앞에서 공포의 침묵을 강요당하지만 흡사 활화산처럼 상황의 성숙이 있을 땐 언제나 비약의 돌파구를 마련했었다.

 일반적으로 학자들은 권위주의에서 민주주의로 이행하는 과정에 자유화(LIBERALIZATION)라는 개념을 상정한다. 그들에 의하면 자유화는 개인이나 집단이 생명과 자유의 치명적인 상실없이도 체제측의 잘못된 정책에 저항할 수 있는 상황을 말하는데 권위주의체제는 반드시 이 자유화의 단계를 거쳐 민주화로 전환한다는 것이다. 이제 민주주의의 뿌리를 내려야 할 시점에서 자유는 통일한국이 지켜 나가야 할 가장 소중한 정치이념임에 틀림없다.

 둘째는 평등의 문제다. 평등은 자유와 함께 근대시민사회의 2대 중심가치다. 우리는 여기서 자유와 평등의 긴장 또는 보완관계에 관한 긴 학술적 논의를 할 겨를이 없다. 다만 간과해서는 안될 것은 근대적인 의미에서 가장 체계적인 평등사상인 사회주의가 바로 그 「권력에 의한 평등」 때문에 적어도 경제체제로서는 지구상에서 예외없이 멸망했다는 사실이다. 권력을 통한 사회주의적 평등은 결국 빈곤의 평등과 하향평준화를 초래함으로써 사회주의 본래의 이상의 문턱에도 들어서지 못했다. 실제로 사회주의국가의 인민보다 선진자본주의 국가에서의 85% 이상의 중산층이 보다 양질의 평등을 누리고 있지 않은가.

 반세기 동안의 자유·자본주의 대 평등·사회주의의 2분법적인 대립은 결과적으로 자유주의적 경쟁을 통한 평등이 훨씬 향상된 삶이라는 것이 입증되었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은 반드시 후쿠야마의 「역사의 종언」으로까지 질주할 필요는 없다고 하더라도 우리가 현대사에서 얻은 값진 교훈임에 틀림없다. 따라서 우리가 통일한국의 정치이념을 구상함에 있어서도 어디까지나 자유를 중심축에 두면서 평등이념을 재정의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인간의 자기실현 욕구와 능력은 잘못 운용하면 엄청난 부패를 낳지만 근본적으로는 역사발전의 원동력이 되어 왔다. 현대사의 경험에서 보면 양질의 평등은 자유를 통해서만이 가능하며 또한 그 자유가 방종으로 타락하는 것을 막아주기도 한다.

 그 다음 셋째는 평화의 추구다. 우리는 전후 동서냉전의 최초의 희생으로서 동족상잔의 처참한 사상전쟁을 치렀으며 그 유산은 현대한국사회의 모든 갈등의 뿌리로 남아 있다. 따라서 한반도의 평화는 우리 시대의 지상과제며 통일의 수단인 동시에 목적이기도 하다. 우리는 고도로 산업화된 민주국가간에는 과거 2백년동안 단 한번도 전쟁이 없었다는 경험적인 연구결과에 주목해야 한다. 그리고 평화는 단순히 「전쟁의 부재」에 머무르지 않고 체제의 민주화를 통한 구조폭력의 배제에 눈을 돌려야 한다. 최근 시민의 호응을 크게 얻고 있는 환경운동·생명운동은 운동측의 자기개혁에 신선한 충격이 될 것이며 그 평화의 메시지는 나라 안팎으로 요원의 불길처럼 번져나갈 것이다.

 세계사의 흐름으로 보나 한반도의 객관적 조건으로 보아 시간은 분명 한국편에 있다. 우리는 8·15의 과제, 즉 해방한국에서 민주한국 그리고 통일한국을 주도해야 할 역사적 사명을 부여받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대승적 차원에서 인내와 관용으로 국내통합을 이루면서 언젠가 들이닥칠 통일에 대비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 문제의 국제적 성격을 간파할 수 있고 통일한국의 미래에 대한 확고한 철학을 가진 지도자를 키워나가야 한다.<고려대교수·한국평화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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