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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봉제완구업체 C&H사/“현지화 경영” 4년 결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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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봉제완구업체 C&H사/“현지화 경영” 4년 결실

입력
1994.08.0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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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해 매출 4천만달러/“4천식구” 대기업 성장 스리랑카 콜롬보시 외곽 비야가마공단내의 봉제완구전문업체 C & H사(사장 최규민·50)는 스리랑카에 진출한 한국기업중 성공한 기업의 하나다. 89년 8월 재봉틀 1백70대로 비교적 소규모로 출발했던 이 회사는 4년만에 1만8천여평의 부지에 협력업체만도 6개사, 재봉틀 1천7백50여대에 종업원 4천5백여명의 대기업으로 성장했다. 대표적인 노동집약산업인 국내 봉제완구업이 사양길로 접어들자 일찍부터 해외 진출을 모색, 뛰어난 노무관리와 해외시장개척으로 탄탄하게 자리잡았다.

 C&H사의 지난 해 총매출액은 3천2백50만달러로 92년 2천3백만달러보다 41.3%나 늘었으며 올해 목표는 약 4천만달러로 잡고있다. 미키마우스 도널드 덕등 약 2백여 종류의 봉제완구는 미국 월트디즈니사등에 납품된다. 중국 심천에도 플라스틱 전기완구공장을 준공, 가동중이다.

 87년 4월 스리랑카에 첫발을 디딘 뒤 88년 4월 현지법인 설립때까지 1년동안 스리랑카의 투자여건을 면밀히 조사했던 최사장은 『내륙운송이 편하고 수출입 절차가 간단할 뿐만 아니라 외환송출마저 자유롭다는 생각에서 투자를 결정했으며 현재까지 이 판단은 틀리지 않았다』며 만족해했다.

 C & H사는 공장가동이 정상궤도에 돌입하자 한국에서 함께 일했던 K & S사등 원단 염색 봉제 플라스틱 분야 협력업체 6개사도 불러 들였으며 한국인 종업원 60명을 진출시켜 스리랑카 현지 근로자들의 기술지도를 맡게했다.

 특히 한국인 기술자와 현지 근로자들간의 언어장벽 해소를 위해 신입사원들에 대해 한국어를 가르치고 양국간의 문화와 관습의 이해를 통한 근로의식 고양을 위해 현지근로자들의 관혼상제에는 한국인 직원들이 꼭 참석토록 했다. 더욱이 전 직원들에게 똑같은 유니폼을 입혀 소속감을 높였고 상사에 대한 예절교육을 시켰을 뿐 아니라 근로자들의 주거환경개선을 위해 기숙사를 건설, 순차적으로 현지근로자들을 입주시키고 있다. 임금도 스리랑카에서는 생산직 사원치고는 최고수준인 월평균 70달러를 지급하고 있다.

 C & H사에는 사규가 없다. 스리랑카의 노동관련법을 사규로 삼고있어 노사문제에 말썽이 생길 여지가 없다. 최사장은 『한국인 근로자들보다 기능의 차이때문에 생산성이 떨어지는 게 아니냐는 지적이 있긴 하지만 공장부지를 제공받는 것이나 인력난이 없다는 점에서 상쇄가 돼 생산성은 한국과 거의 비슷한 수준』이라고 말했다.【콜롬보=남재국기자】

◎스리랑카의 자랑스런 한국인/어린이 보육시설운영 의사 강원희씨/해외오지 박애활동 13년째/네팔 등 거쳐 91년 스리랑카에/부인도 극빈아 17명 엄마손길

 지난 91년 10월부터 스리랑카의 극빈층을 무료로 치료해 주고 있는 강원희씨(60)는 스리랑카 사람들에게 고마운 한국인으로 통한다.

 한국 예수교장로교총회 전도부 장로인 강씨의 무료진료는 선교활동의 일환이기도 하지만 전도에 앞선 헌신적 봉사는 불교도가 대부분인 스리랑카인들로부터 마음에서 우러나는 찬사를 받고 있다.

 강씨는 현재 콜롬보시 외곽 갈레지역에서 「백학마을」이라는 어린이 보육시설을 운영하면서 스리랑카 어린이 17명과 함께 생활하고 있다. 백학마을은 스리랑카에 진출한 우리나라 대표적 모자생산업체인 (주) 영안모자가 후원해 건설했다.

 강씨는 어린이들을 돌보면서 찾아 오는 주민들의 병을 치료하거나 스리랑카 남부·중부지역 오지마을을 찾아다니며 무료검진활동을 펴고 있다. 지금까지 다닌 곳만도 40여 마을에 이르고 그로부터 무료검진을 받은 사람만도 1만4천명이나 된다.

 강씨가 오늘에 이르기까지에는 고비도 많았다. 우선 종교적 차이가 큰 문제였다. 힌두교·이슬람교 신자인 주민들이 아이들을 데려다 식사를 제공하고 기도회를 가지면서 성경을 가르치는 그를 못마땅해 했던 것이다.

 『그때마다 주민들을 초청해 다과를 베풀며 선교만이 목표가 아님을 설득했습니다. 처음엔 믿지 않던 주민들도 나중엔 자기 자녀들을 백학마을에서 길러줄 수 없겠느냐고 하더군요』

 강씨가 한국을 떠난 것은 지난 82년. 61년 연세대 의대를 졸업하고 속초에서 병원을 개업, 남부럽지 않게 살았던 그는 뭔가 뜻있는 일을 해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됐다. 그래서 택한 게 해외무료진료활동. 네팔·방글라데시등 오지국가만을 돌며 부인 최화순씨(58)와 죽을 고비도 많이 넘겼다. 방글라데시에서는 태풍을 만나 마을 전체가 풍비박산이 나고 주민 모두 실종된 광경을 보고 눈물을 펑펑 쏟은 적도 있다. 네팔에서는 5일을 걸어 오지마을 진료를 다녀 오다 괴청년들을 만나 목숨이 위태로웠던 적도 있으나 「코리언 닥터」라고 신분을 밝히자 아무런 해를 입히지 않아 위기를 모면한 적도 있었다.

 부인 최씨는 스리랑카 어린이들과 백정임씨(38)등 한국인 간호사와 현지 직원들을 위한 식당 일을 맡으며 남편의 활동을 뒷바라지하고 있다.

 강씨는 『한국을 세계에 알리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다』며 『선교를 위한 무료의술활동이라 하더라도 결국은 이방인들에게 한국에 대한 좋은 이미지를 심어주는 역할을 한다고 본다』고 말했다.【콜롬보=황양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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