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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며느리의 역할/박명진(한국 논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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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며느리의 역할/박명진(한국 논단)

입력
1994.08.0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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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는 전진과 후퇴를 반복하며 진행하는 것이라 했던가. 몇달전에는 성희롱을 단죄하는 판결로 여성들의 움츠린 어깨를 펼 수 있게 해주었던 사법부가 몇주전에는 기혼여성들을 힘빠지게 하는 판결로 큰 실망의 충격을 주었다. 직업을 가지고 있는 부인과의 사이에 남매를 두고 있었던 30대 후반의 남편이 낸 이혼청구 소송에 대한 가정법원의 판결이 그것인데, 전통적인 며느리 역할이나 남편에 대한 내조의 소홀은 남편의 부정을 정당한 것으로 만들 수 있을 뿐더러 이혼의 합당한 사유가 될 수 있다는 것이 그 판결의 요지이다. 판결을 내린 법관들로서는 나름대로의 법리적인 설명과 주장이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 판결이 하나의 사건을 해결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판례가 되어 사회적 규범으로서의 힘을 갖게 되는 것이므로 오늘날의 부부 및 가족관계에 대한 사회적 판단기준으로서 적절한지 여부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우선 이 판결은 직업을 가진 기혼여성들에게 거의 불가능한 것을 요구하고 있다는 점에서 정의롭게 느껴지지 않는다. 우리 사회는 기혼남자들에게 직장생활에 충실할 것을 우선적으로 요구할 뿐 가정을 관리해 나가는 의무는 면제해 주고 있다. 그러나 남자에 비해 더 강한 체력을 가진 것도 아닌 여성들이 직장생활하는 경우는 직장생활의 충실은 물론 살림과 육아까지 잘 해내도록 요구한다. 그런데 이번 판결은 그 위에 전통적인 며느리 역할과 남편에 대한 내조까지 당연히 해야 할 「의무」로서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어떤 슈퍼우먼이 이 모든 것을 탈없이 무난하게 해낼 수 있다는 것인가. 기혼여성의 50%이상이 이미 직업생활을 하고 있는 오늘의 현실에서 이는 몇몇 개인에만 해당되는 문제가 아니다.

 두번째로는 전통적인 며느리 역할에 대한 강조가 정당성을 얻으려면 변화된 사회적 조건에 맞추어 남편측의 처가에 대한 사위로서의 상응하는 역할이 함께 요구되어야 했다는 점에서 형평을 갖춘 것이었다고 보기 어렵다. 판결문을 보면 문제된 부부의 경우도 갈등의 상당부분이 이같은 불공평에 대한 아내의 불만에서 비롯되었던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바로 이것이 「자기의 생활방식만을 고집하고 전통적 며느리의 역할을 소홀히 했다」는 지적이었던 것 같다.

 오늘을 사는 한국의 며느리들중 시집에 대한 의무감에서 벗어나 사는 사람은 거의 없겠지만 그것을 흔쾌히 수용하고 있는 사람도 드물고 대부분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얼마간 억울한 느낌과 불만을 함께 지니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그런데 이 억울하다는 느낌과 불편한 마음의 정체는 무엇이며 어디에서 오는 것인가. 그들이 전 세대보다 이기적이고 부모를 생각하는 마음이 희박해서인가. 그 것만은 아닐 것이다. 그보다는 사회적 조건이 많이 변했고 그들이 받는 합리성의 교육효과 때문이라고도 할 수 있다.

 핵가족시대 며느리들은 예전같은 대가족 개념의 가족 소속감을 갖기가 어렵다. 또한 서양식 합리주의에 기반한 신식교육을 받은 그들에게 친정부모에 앞서 시부모를 우선적으로 공경해야 한다는 주장도 납득이 쉽지 않다. 학교에서 유교식의 효개념을 가르치지만 거기에는 「날 낳으시고 키워주셨기 때문에」라는 것이외의 다른 논리는 없다. 그러므로 낳아주고, 스무살 훨씬 넘게까지 길러주고, 공부시켜준 친부모를 제끼고 남편의 부모를 공경해야 한다는 것이 논리적으로는 설득력을 가지기 힘들다. 이에 비하면 어린 나이에 생활능력도 없는 어린 신랑에게 시집가서 시부모에 의해 양육되다시피하면서 잔뼈가 굵어졌던 조선시대의 며느리들에 대한 시부모 공경요구는 오히려 더 합리적일 수 있다. 그런데 사회에서 불문율처럼 요구하니 따라가기는 하면서도 승복하기 어렵고 불만과 억울한 마음이 없지 않은 것이다. 더구나 남편과 함께 생계를 책임지는 아내들의 경우에는 더욱 그럴 것이다.

 만일 며느리와 사위에게 같은 것을 요구하고, 며느리의 배려를 당연한 의무수행으로 여기는 대신 친정부모들이 사위의 배려에 대해 그러하듯 고맙게 받아들이게 되며, 시부모공경을 친부모에 앞서는 의무로서 일방적으로 강요하는 사회적 분위기가 사라진다면, 억울한 마음으로서가 아니라 오히려 편안하고 기꺼운 마음으로 공경할 수 있게 되는 것은 아닐까. 더구나 남편과 함께 강요되는 의무가 아닌 자발적 선행은 누구에게나 즐겁기 때문이다.

 이혼율이 높아지는데서도 알 수 있듯이 오늘날 가정은 분명히 많은 문제를 가지고 있다. 하나의 사회적 제도로서 가정법원의 존재이유는 가정적 분쟁해결이라는 기능적인데만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정의로운 부부관계, 가족관계의 기준을 정립해 나감으로써 가정을 보호하고 유지될 수 있도록 돕는 것이 그에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라 생각된다. 그런데 사회적인 규범화될 수밖에 없는 그 기준이 좋은 의도에도 불구하고 변화하는 사회에 맞지 않을 경우, 해소가능한 갈등을 오히려 심화시켜 가정의 유지를 더욱 힘들게 할 수도 있을 것이라는 우려를 금할 수 없다.<서울대 교수·언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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