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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픔이 더 생생한 「돌려말하기」/정양 「해장국밥 앞에서」(시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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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픔이 더 생생한 「돌려말하기」/정양 「해장국밥 앞에서」(시평) 

입력
1994.08.0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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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경열 서울대 영문과 교수 재치있는 표현 몇마디, 충격적인 말 몇마디로 시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적지 않은 시들이 이런 종류의 말장난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도 사실이다. 삶에 대한 사랑과 이해를 생생하게 드러내는 시, 삶의 현장에 서 있는 시인의 모습을 선연하게 떠올리게 하는 시다운 시를 만나기란 쉽지 않은 것이다. 기껏해야 광고 문안의 글귀 수준을 맴돌 뿐인 시들 사이를 헤매다 마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러다가 우리는 문득 정양씨의 「해장국밥 앞에서」(『실천문학』 여름호)와 같은 시와 만난다.

 「해장국밥 앞에서」라는 시에서 우리는 우선 지난 2월 작고한 김남주 시인을 떠나 보내기 위한 밤샘 끝의 시인과 만난다. 「술도 잠도 덜 깬 늦은 아침/서둘러 해장국밥 먹으러 간다」. 상가에서 밤을 보내고 밖으로 나온 시인의 눈에 들어오는 것은 「서둘러 녹」는 「길모퉁이 녹다 만 눈들」과 「오가는 발길 사이로」 「어지럽게 부서」지는 「햇살」이다. 「술도 잠도 덜 깬」 시인이 느끼는 눈의 피로가 하얀 빛의 눈과 이를 「서둘러 녹」이는 「어지」러운 햇살로 생생하게 살아난다.

 그러나 눈의 피로는 단지 술을 들었다거나 제대로 잠을 자지 못했기 때문만이 아니다. 「안경알 빠져버」려 「세상이 다 흐려 보」였기 때문이기도 하다. 사실 「세상이 다 흐려 보」였던 것은 안경알이 단순히 빠져버렸기 때문만은 아니다. 작고한 시인에 대한 안타까움 때문이건, 삶에 대한 아픔 때문이건 시인에게는 「세상이 다 흐려 보」일 수밖에 없었던 충분한 이유가 있다. 이를 시인은 「술이 덜 깬 탓」에 「안경알 빠져버린 걸 미처 모르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돌려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돌려 말하기」가 아니었다면 시인의 안타까움과 아픔이 어찌 이 시에서처럼 생생하게 살아날 수 있겠는가.

 이윽고 시인은 「해장국밥 기다리는 동안/안경알을 닦으려다가/알 빠진」 것을 알아차리고 「알 빠진/안경테처럼」 「멋쩍」음을 느낀다. 사는 것이란 다 그런 것이 아닌가. 「잃어버린 줄도 모르면서/ 그냥쨩 잃어버」린 채 본능적인 허기나 달래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다가, 「해장국밥」을 「앞에」 놓고 허기를 달래려다가 「잃어버리고 사는 것들이/토막난 필름들이 토막난 그리움이」 문득 「한꺼번에 다투어지나」감에 「난데없는 눈물이/토악질처럼 쏟아지」는 것이 곧 우리의 삶이 아닐까.

 잃어버린 사람에 대한 안타까움, 삶의 아픔을 이 시만큼 선연하게 살리기란 쉽지 않다. 이 시에서 우리가 시다운 시를 읽을 때 느낄 수 있는 시인의 마음 떨림을, 그러한 떨림에 공명하는 우리 마음을 느낄 수 있음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그 「앞에서」 우리 눈은 또한 「흐려」지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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