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격 최소화속 검은돈 본때” 의지/계좌추적도 혼란우려 전혀안해/「위력」 기대 일반국민 “달라진게 없다” 실망도 지난해 8월12일 전격도입된 금융실명제의 시행 1년을 돌아보면 장기적 무혈혁명과 같은 전략이 구사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실명제를 통해 과거의 가명질서를 실명질서로 바꾸되 엄청난 경제적 충격·단절이 예상되는 단기적 유혈혁명과 같은 방식 대신 장기간에 걸쳐 표안나게 실명질서를 굳혀 희생을 최소화하겠다는 당국의 의지가 지난 1년간 실명제 시행과정에서 명확히 드러난다.
실명제는 지난 1년간 위력과 한계를 동시에 보여줬다. 실명제가 급박한 변화를 쉴틈없이 가져오리라고 기대한 쪽에서는 『실명제를 시행한 결과 달라진 게 뭐냐. 실명제이전이나 이후나 별다른 변화가 없지 않느냐』고 실망담긴 평가를 내린다. 반면 실명제 도입이전의 가명사회에서 지하거래 거액정치자금 비자금등의 문화에 익숙해있던 사람들은 『실명제때문에 과거의 거래행태를 유지하기가 불가능하게 됐다』고 말한다.
그러나 일반 시민들은 아직까지는 위력보다는 한계를 더많이 보여준 쪽으로 평가하고 있다. 이는 실명제 도입후 1년간 정부당국이 실명제의「무충격 정착법」을 구사해온 탓으로 풀이된다. 정부는 실명제가 금융시장이나 실물경제에 가시적인 충격과 파문을 던지는 것을 극력 꺼려왔다. 지난 1년간 특정인의 금융거래내역을 훤히 들여다 볼 수 있는 번듯한 계좌추적이 단한건도 이뤄지지 않았다는 사실에서도 이를 알 수 있다.
실명제이전에 계좌추적은 범죄혐의자나 지하자금거래자의 돈흐름을 파악할 수 있는 단골수법이었다. 당시엔 가명거래가 가능했으므로 거래과정에 얼굴없는 가명이 끼여들어가 「돈세탁」을 하면 계좌추적이 벽에 부딪칠 때가 많았다. 따라서 실명제를 시행하면 중간에 가명계좌가 끼여들 여지가 사라지므로 돈흐름이 고스란히 드러나게 되리라는 기대가 컸다.
그러나 막상 실명제가 시행된 후에는 오히려 이전보다도 계좌추적 자체가 극도로 제한받게 됐다. 계좌추적이 쉽게 이뤄진다면 돈많은 사람들이 금융기관 거래를 꺼려 돈을 무더기로 빼내 가거나 실물투자를 해 혼란이 일어날 가능성이 크다고 보고 계좌추적조건을 더욱 빡빡하게 만든 것이다. 그러니 비정상적 금융거래들이 속속들이 밝혀져 대가를 치르리라고 잔뜩 기대했던 사람들 편에서는 더욱 답답해지기만 한 것이다.
정부는 지난 1년간 느림보 거북걸음만을 계속해 왔다. 결국 국민일반의 실명제에 대한 기대수준을 하향조정하는 작업을 계속해온 셈이다. 실명제 기대수준을 깎는 대신에 일반국민들은 안정적인 경제성장을 지속적으로 향유할 수 있게 됐다고 정부는 밝히고 있다. 큰손들에게 한번 본때를 보여주고 경제가 휘청거리거나 주저앉는 희생을 치르느니 큰손들을 실명제 시행시점에서 일단 묶기만 한 후 경제가 교란되지 않도록 하는 카드를 선택했다는 설명이다.
이에 따라 큰손을 비롯한 과거의 가명자금보유자나 거래자는 비자금조성, 사채거래, 세금회피등을 하는데 있어 종전의 방법을 쓸 수는 없게 됐으나 아직 실명제에 의해 과거의 지하부문(비실명 돈)을 박탈당하는 「무장해제」까지는 겪지 않고 있다. 정부는 실명제이후 실명예금으로 전환한 거액의 가·차명예금에 대해 올상반기중 세무조사를 벌일 예정이었으나 하반기로 미뤘고 조사대상도 그리 많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이런 방침은 모두 과거의 가명질서를 피를 흘리지 않고 실명질서로 바꾸겠다는 「무혈혁명」입장에서 나오는 것이다.
그러나 실명제의 개혁성을 인정받으려면 가시적인 성과를 보여주어야만 하는 측면도 있다. 또다른 1년을 시작하는 시점에서 일반의 기대를 정부가 과연 어떤 식으로 처리할지 궁금한 대목이다.【홍선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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