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은행은 며칠전 일선은행들에 대해 당분간 가계대출을 억제해달라고 요청했다. 하반기경제에 「발등의 불」로 떨어진 물가를 잡으려면 시중에 풀리는 돈의 양을 좀 줄여야 하는데 공장을 돌리는 기업들에 자금공급을 중단할 수는 없고 결국 생산활동과는 무관한 가계대출을 줄이는 수밖에 없다는 판단에서였다. 은행들은 한국은행의 「요청」(지시로 여긴듯)을 즉각 받아들였고 일부 점포에선 신규개인대출이 거의 중단되고 말았다. 당국은 「소비성자금」인 가계대출증가에 늘 고까운 시선을 보내왔다. 작년이후 풍부한 자금사정을 바탕으로 은행들이 「즉시신용대출」 「예금가입 동시대출」등 현란한 문구를 앞세워 「돈세일」을 벌이면서 은행권의 가계대출 규모는 급증했고 곳곳에서 『가계대출이 과소비와 인플레를 조장한다』는 우려가 쏟아졌다. 몇백만원을 손쉽게 융자받아 차 사고 가구 바꾸고 해외여행까지 즐기는 소비풍조가 생겨나는 것을 보면서 생산현장에 줄 돈도 부족한데 이런 낭비부문에 은행돈을 꿔줄 수는 없다는 인식이 팽배해졌다.
하지만 이럴 때마다 언제나 괴로운 것은 은행돈을 빌리지 않고는 전세값도 자녀학자금도 마련하기 힘든 서민들이다. 담보없는 중소기업이나 변변한 회사 간판도 없이 구멍가게같은 공장을 꾸려가는 영세업자들도 마찬가지다. 사업자금이 급해 은행측과 대출상담을 끝내고 며칠후 서류를 냈더니 『당분간 신규대출은 안된다』고 퇴짜맞은 자영업자도 있다. 승용차를 사고 바캉스를 즐기려고 대출을 받던 사람들은 안사고 안쓰면 그만이지만 「생계」를 위해 은행돈을 빌리려던 사람들은 살 길이 막막해 진다.
가계대출 억제도 결국 기업의 자금 몫을 늘려주자는 취지지만 정작 일부 대기업들은 은행돈으로 주식투자하고 고이의 2금융권에서 돈놀이를 일삼고 있다. 돈 남으면 대출세일, 통화관리가 강화되면 대출사절 간판을 걸어놓는 은행들의 모습은 「경제의 적재적소에 필요자금을 공급한다」는 그 존재목적과는 너무도 동떨어져있다. 절실한 사람에게만 높아지는 은행문턱을 두고 「그저 만만한게 서민」이란 말이 나올만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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