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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준비와 냉전사고 탈출/정운찬(한국논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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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준비와 냉전사고 탈출/정운찬(한국논단)

입력
1994.07.2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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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일성 사후 북한과 남한에서 벌어진 어처구니없는 일들은 통일에의 길이 멀고도 험함을 다시 한번 일깨워 주었다. 조선조의 인산을 연상시킨 북한인의 조문행렬과 오열하는 통곡장면은 자발적인 것이건 동원된 것이건간에 북한사회가 얼마나 오랫동안 폐쇄되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었다. 또한 아직 완성되지는 않았다고 하나 김일성으로부터 김정일에로의 권력세습은 북한이 근대민주주의와는 너무 거리가 먼 전제왕국임을 증명하기에 충분하였다. 그런데 남한에서도 예기치 않은 일들이 벌어졌다. 우선 김일성 사망후 정부가 보여준 우유부단한 태도는 혼란을 야기하였다. 급기야 일부 야당의원들의 조문관련 발언이 파문을 일으켰고 이를 십분 이용하려는 여권과 언론은 냉전사고의 불씨를 살리려고 안간힘을 쓰는 듯 하였다. 특히 일각에서는 마치 시위는 물론이려니와 학원 전체가 주사파학생들에 의해 좌우되는 것처럼 보이게 했다.

 여기서 대학이 언론이 보도하는 것보다는 매우 건전하다는 것을 설득할 겨를은 없다. 그러나 주사파가 학생운동을 대변하는 세력은 아니다. 또한 거의 모든 학생들은 맹목적인 주체사상 신봉론자들의 고루한 주장이나 경찰서 습격, 열차정지등의 행태에서 나타난 비이성적 행위를 소리높게 비판한다.

 어떻든 남한과 북한은 오랫동안 서로 다른 체제를 유지해 왔기 때문에 화해의 제스처를 교환해도 당장 통일이 힘들다. 그런데 화해는 커녕 반목을 부추기는 사회분위기는 통일에 걸림돌이 될 수 밖에 없다.

 지금 나라밖의 사정은 급속도로 변하고 있다. 세계는 이미 냉전사고를 극복했고 한 걸음 더 나아가 국익을 위해 미소를 팔고 다니는 장사꾼의 판이 되어 버렸다. 아시아에 국한해 보더라도 지난 5월 미국은 베트남과 연락사무소 조기 설치에 합의한데 이어 일본과는 종전의 수치목표를 내세운 무역압력을 포기하고 포괄경제협의를 재개했으며, 중국에 대해서는 무역최혜국대우(MFN)연장을 볼모로 한 인권개선 요구를 철회하였다. 또한 6월에 들어서는 카터를 북한에 보내 핵문제와 북미관계 개선을 함께 타결짓는 일괄협상에 합의하였다.

 과거의 냉전적 대결과는 전혀 다른 양상으로 국익을 추구하는 것이다. 이제 미국은 북한과 가까워질 것이 틀림없다. 중국은 북한도 놓치지 않으려 하지만 경제제일주의 때문에 미국과도 밀착할 것으로 보인다. 일본도 북한과 수교를 서두를 것은 뻔하다. 이런 판국에 우리만 냉전의 고도에 머물러서는 안된다.

 한편 한국산업은행 조사부가 연구한 바에 의하면 남북한간의 1인당 GNP는 1970년대 초반까지는 북한이 앞섰지만 70년대 중반부터는 남한이 앞서기 시작하여 93년 현재 남한이 북한에 비하여 8·3배에 이르렀다. 인구를 남 대 북 2대1로 잡으면 남한의 경제수준이 적어도 북한의 15배는 된다는 이야기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가 강자의 관용을 베풀기는 커녕 10년 또는 그 이전의 냉전이데올로기로 북한을 대하는 것은 통일을 위해 바람직하지 않다.

 나는 통일지상주의자가 아니다. 과거 성장제일주의가 여러 가지 불균형을 낳았듯이 통일지상주의도 갖가지 부작용을 가져올 것이 틀림없다. 통일은 목표라기보다는 수단이어야 한다. 그것은 남·북한인의 물질적 생활과 기본권을 증진시키는 것이어야 가치가 있다. 따라서 무리하게 통일을 서둘러서는 안된다. 그러나 통일을 위한 준비는 서둘러야 한다. 구 서독은 브란트의 동방정책이후 오랫동안 통일준비를 해왔을 뿐 아니라 막강한 경제력을 활용하여 변화하는 국제정세 속에서 통일을 사들이다시피 했다. 구 소련으로부터 샀다고 할 수도 있고 고르바초프, KGB, 동독의 관리, 동독의 비밀경찰등으로부터 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어쨌건 그들은 차분히 실력을 배양하고 있다가 기회를 포착한 것이다. 물론 통일직후에는 여러가지 혼란을 겪었으나 현재는 독일경제의 앞날을 낙관해도 좋게 되었다.

 우리가 독일의 지난 경험을 그대로 밟을 필요는 없다. 그러나 한 가지 확실한 것은 통일하려는 의지와 경제적 기반조성은 통일의 필요조건이고 기회포착은 충분조건이라는 사실이다. 그리고 이러한 제 조건을 구비하자면 경직적인 냉전사고로부터 탈출해야만 한다. 구태의연한 냉전사고로는 유동적인 국제환경에 신축적으로 대응할 수 없을 뿐더러 자칫 국가의 실익을 놓쳐 버릴 수도 있다.

 지금 우리나라에는 70년대식의 냉전적 분위기가 일고 있다. 이 분위기 때문에 개혁이나 국제경쟁력등 현안들이 밀리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분위기는 득보다는 실을 초래할 것이다. 진정한 통일준비는 감정보다는 이성에 호소하는 것이어야 하고 명분보다는 실리를 앞세우는 것이어야 한다.

 우리는 지금부터라도 소모적인 논쟁보다는 경제사회의 건전한 틀의 정착 및 각종 불균형의 제거를 통해 우리 경제의 내실을 기하는 데에 더욱 관심을 가져야 한다. 이것이야말로 언제가 될지 모를 통일시대를 준비하는 우리에게 최우선적으로 요청되는 과제이다.<서울대교수·경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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