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조는 역사의 기로에 서 있었다. 동학 농민봉기를 기화로 조선에 진출한 일본군은 1894년 7월23일 경복궁을 강점하고 대원군을 추대한다. 이어 김홍집 중심의 친일 개화파가 27일 군국기무처를 신설하여 「대경장」의 막을 올린다. 「근대」의 시대에 동참하려는 조선조 최후의 개혁운동이었다. 갑오경장파는 중국과의 사대의예를 폐기하고 자주를 선언한다. 그리고 양반 상민과 문존무비의 차별을 철폐하고 공사노비의 해방에 나서면서 민족 내부의 벽을 허문다.
그러나 대경장은 출발부터 좌절의 씨앗을 품고 있었다. 일본은 9월말에 청일전쟁의 무대를 만주로 확대하면서 조선을 장악하기 위한 치밀한 수순을 이미 밟고 있었지만 조정은 격렬한 내분에서 헤어나려 하지 않았다.
개혁정치가 펼쳐지는 19개월 동안 갑오경장파는 정통파와 궁정파의 저항에 부닥쳤다. 하지만 대원군파와 결별한 직후에 구축한 갑신정변파와의 연대전선은 내부 알력탓에 개혁정국을 안정시키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러나 정치사회의 지각변동에 불만을 품어온 고종이 을미사변에 격노하여 러시아 공사관에 피신하고 결국 개화파는 망명의 길을 떠나고 만다. 조선이 「막차」를 타고 근대의 시대에 동참할 기회는 이때 사라졌다.
아니 자체 역량으로 이 땅에 근대의 정신을 심어놓을 기회는 애초부터 없었는지 모른다. 대다수의 조선인은 가문이라는 테두리를 넘어서서 민족이라는 커다란 동심원을 그려본 적이 없었다.
게다가 개혁은 성공하기에 너무 외세 의존적인 것이었다. 대경장은 선발 개발국가인 일본이 조선에서 지배적 위치를 확보하기 위한 정책의 일환으로 치밀히 기획하고 연출한 「개국」이었다. 따라서 근대화를 추진하기보다 파멸을 자초할 위험성이 높았다. 일본의 후원아래 개혁한다는 전략은 생존이라는 개혁의 목적 자체를 파괴할 위험한 발상이었다.
그러나 역시 한민족은 자기혁신의 능력을 가진 동적인 존재였다. 청보다 더 「소중화」적인 세계속에서 살았던 조선은 사라지고 「부」와 「강」의 신화를 창조한 한국이 이 땅에 서 있다. 한민족은 이제 어제의 한민족이 아니다. 백년전에 시작한 수탈의 역사속에서 우리 국민은 민족과 나라에 대한 사랑을 키웠고 격변하는 세계를 이해할 안목을 다져 놓았다. 민족주의의 바탕 위에서 국제주의 노선을 펼쳐야 살아남는 근대의 패러독스를 체험으로 터득한 것이다.
그러한 국민이 있는 한 우리의 미래는 밝다. 주권을 지켜줄 힘이 거기에 자리하고 「당쟁」을 반복하는 초라한 정치권을 채찍질할 정신이 거기서 우러나온다. 백년이 지난 지금 대경장을 생각하는 것은 그러한 국민에게 찬사를 보내기 위해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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