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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를 위한 문학대강연회/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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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를 위한 문학대강연회/요약

입력
1994.07.2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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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장 광범한 독자층이 있는 작가로 볼 수 있는 소설가 박경이씨와 이문열씨가 25일 하오 경주 코오롱호텔 오운홀에서 독자를 위한 문학대강연회를 가졌다. 독자 3백여명의 뜨거운 호응속에 마련된 이 강연회의 강연내용을 요약, 소개한다.<편집자주> ◎「문학과 삶」/박경리/문학엔 생명에 대한 연민 있어야/삶의 불완전성을 인식하는 것이 중요

 40여년 전 갓 등단해 대학논문사에서 주최하는 문학강연에 청중으로 참석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 강사가 문학평론가인 조연현선생이었는데, 갑자기 저를 보고 단상에 나와 인사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때 저는 『내 삶이 평탄했더라면 나는 문학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내 삶이 불행하고 고르지 못했기 때문에 문학을 했다』고 말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유치해 보이기도 하지만, 가끔 그 말이 생각납니다. 근원적으로는 내 문학관의 표현이고, 40년이 지난 지금에도 변함없는 생각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아직까지도 삶 자체가 가장 소중하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의 완성이야말로 진실한 예술의 완성입니다. 여러분은 『왜 그러면 당신은 25년동안 외부와 접촉도 않고, 가정생활도 않고 시골에 혼자 살면서 문학을 했느냐』고 묻겠지요. 「박경이는 문학을 하면서 자기를 희생했다」고 볼 수도 있을 겁니다. 그러나 저는 제가 희생됐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삶은 완전하지 않습니다. 완전을 향한 소망을 문학에 넣는 것입니다. 저는 그 일을 해왔습니다.

 나는 「인생」이라는 표현을 하지 않고 「삶」이라고 말합니다. 「인생」은 사람들만을 얘기하는 표현이지만, 「삶」에는 모든 생명이 포함됩니다. 삶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시간, 공간, 운동을 이해해야 할 것같습니다. 시간은 무한하기도 하지만, 삶에서 생각할 때는 유한한 것입니다. 태어나고 죽는것이 시간입니다. 지구라는 공간에는 산도 있고 강도 있고 사막도 있습니다. 거기에 한 생명이 존재할 때는 일률적일 수가 없습니다. 혜택받은 생명과 고난의 생명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공간은 절대적인 것이 아닙니다.

 또 삶이란 모든 사람이 시간과 공간 속에서 운동하는 것입니다. 주어진 시간, 주어진 공간에서 각기 운동의 양상이 달라집니다. 인간의 성격이라고 말할 수도 있고, 운명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요.

 삶이 불완전하다는 것은 원천적으로 시간, 공간, 운동이 불완전하다는 말입니다. 영구불변하게 살 수 있고, 완벽한 공간에서 산다면 삶을 생각할 필요가 없겠지요. 완벽함 속에서는 고통, 싸워야 할 것, 이별등이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문학이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정치·경제·과학 모든 분야에서 인간이 소망하는 것은 지상낙원입니다. 그것을 실현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거기에 도달하고자 하는 염원이 있습니다. 그냥 가능성입니다. 생명의 가능성입니다. 

 요약해 말하면, 인생이 문학에 앞서는데, 이것이 불완전하기 때문에 우리가 문학이라는 한 방법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누구도 지상낙원에 도달하리라고 생각하지 않지만, 끊임없이 거기에 도달하려고 합니다. 거기에 문학의 본질이 있는 것입니다. 생명에 대한 연민이 없으면 작가가 되지 말아야 합니다.

 또 한 가지 말하고 싶은 것은 기존의 틀을 깨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외국의 이론을 들어가며 일정한 틀을 만들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시간, 공간, 운동이 모두 불완전한데 어떻게 틀을 만들 수 있겠습니까?

 우리 민족의 정서에는 이미 이러한 가능성이 있습니다. 우리의 대표적인 고전소설인 「춘향전」, 「흥부전」, 「심청전」만 봐도 알 수 있습니다. 권력자의 억압을 이야기한 「춘향전」, 가난을 이야기하는 「흥부전」, 죽음을 이야기하는 「심청전」이 심각한 비극이 되지 않고, 희극적인 요소가 있습니다. 희극과 비극이 함께 어우러집니다. 이것은 모순을 인식한다는 것입니다.

 흔히 모순을 부정적으로 생각하지만, 모순이 없으면 생명이 존재할 수 없습니다. 살려고 이 세상에 나왔지만, 죽게 돼 있습니다. 지구는 원심력과 구심력이라는 모순되는 운동에 의해 존재합니다. 생명은 불가사의한 것입니다. 우주의 질서나 지구의 질서는 불완전합니다. 서로 모순되고 상충됩니다. 하물며 한 인간이 어떤 틀을 만들고 이 안에 모든 것을 집어 넣으려고 하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우리 고전소설의 예를 들었지만, 저는 우리에게 선험적으로 내려오는 것을 살려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꿰맞추는 것은 창조가 아닙니다. 근원적인 생명을 다루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문학에는 위로, 오락, 신념의 전파등 여러가지 기능이 있지만, 가장 본질적인 것은 불완전한 생명을 인식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기존의 형식적인 틀을 깨야 가능합니다.<정리=이현주기자>

◎「문화에서의 투입과 산출」/이문열/독자우려 건강할때 작품 좋아져/나쁜책 많으면 소비자도 책임 느껴야

 문학을 자본주의적 논리에 의한 상품의 생산과 소비 문제로 이해를 하면서, 현재 우리문화 혹은 문학 상품의 생산과 소비 과정이 제대로 이행되고 있는가를 짚어보자는 것이 이 강연의 큰 목적입니다.

 보통 상품에 대한 일차적인 책임은 생산자가 집니다만 소비자도 그들의 욕구가 생산에 영향을 끼치기 때문에 생산품에 책임을 져야 되는 경우가 생깁니다. 그래서 문학 생산자인 작가들에 대한  문학소비자인 독자들의 욕구 투입이 온당하게 이루어지고 있는가에 관해 특히 얘기하고 싶습니다.

 상품의 좋고 나쁨은 상품에 담긴 재료의 질, 그것을 생산하는 기술,  포장과 광고 형태의 유통등 대략 3가지 요소로 결정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보통 재료의 함량 또는 본질적인 성분에 대해서는 생산자에게 엄중하게 책임을 묻습니다. 문학상품도 아주 함량이 떨어져 인체에 해로울 정도가 되면 법률적으로 처벌받기도 합니다. 아직 시비가 다 끝난 것은 아니지만 마광수교수의 경우가 그렇죠. 문학적 보건당국이 개입한 케이스입니다. 그러나 정신적 보건당국의 개입이 아니더라도 작가들은 언제나 더 무거운 심판을 받고 있습니다.

 함량미달의 작품이 계속 나오면 그 작가는 곧 독자들로부터 외면당하고 문학사에서 망각되는데 이것은 가장 가혹한 징벌입니다. 문단내부의 비난도 효과적인 징벌이 됩니다. 그래서 작가가 이상한 베스트셀러나 유해한 책을 생산하면 매스컴의 비난이 아닐지라도 그 책을 만드는 순간에 이미 징벌의 문턱에 들어선 꼴이 되고 맙니다. 저 자신이 문학상품 생산자의 한사람으로서 동료들의 작업을 질적으로 평가할 생각은 없으나 이처럼 여러 면에서 나름대로 책임지고 있다는 점에서는 자신있게 말할 수 있습니다.

 문학상품의 선택기준은 4가지 정도로 요약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첫째는 이미 사용한 사람들의 증언이나 소문, 평판 같은 전문입니다. 둘째로 전문적인 감식능력을 가진 비평가의 평가가 있습니다. 셋째가 일반적으로 높은 수준을 기대하기란 힘들지만 소비자의 감식력이고 그 다음이 출판책임자의 포장과 광고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선 전언을 생각하면 80년대 이후 사회구성원의 고립화 경향이 강해지면서 사람들끼리 머리를 맞대고 전하는 문학상품의 평판은 선택의 판단 기준으로 힘이 약화됐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다음으로 비평가와 출판인의 역할이 있는데 저는 문학인으로서 팔이 안으로 굽어선지 대단히 심각하게 왜곡돼왔다고 보고 있습니다.

 비판기준을 상품자체에 두지 않고  작자가 어느 편인가, 어떤 이해관계에 있는가를 전제하는 경향이 많았습니다. 어떤 그룹의 평론가가 형편없다고 했는데 막상 읽어보니 내용이 훌륭했고 그 반대 경우도 경험한 적이 많습니다.

 이같은 이데올로기적 분파주의는 문학소비자들의 감식력을 왜곡시키고 비평가들 스스로도 신뢰감과 권위를 떨어뜨리는 것입니다. 저는 70년대 말 등단했는데 당시에는 역량있는 평론가의 신문 서평만으로 몇만부의 구매영향력을 발휘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렇게 되지 않습니다. 90년대 들어 상황이 호전되고 있는 것은 다행입니다.

 마지막으로 광고와 포장의 타락인데 원래부터 가장 많이 팔리는 책이 가장 좋은 책은 아니었지만 이렇게 걱정스러운 적이 없었습니다. 70년대까지의 광고는 광고가 크면 책이 어느 정도 좋다는 식이어서 광고와 상품의 질과의 비례성이 유지됐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그 비례관계가 깨지고 매스컴의 거대한 힘을 이용한 과대광고와 허위선전이 작품의 질을 왜곡합니다.

 출판인의 얘기를 들으니까 주요신문에 5단통으로 광고를 4번만 올리면 작품이 좋고 나쁨에 상관없이 무조건 3만부 이상 팔린다는 것입니다.

 불량·유해·함량미달 상품의 유통, 허위광고에 대해서는 생산자와 소비자 한쪽이나 또는 모두를 법률적으로 처벌합니다. 문화상품에서도 그런 예를 찾을 수 있습니다. 파급되면 위험한 별 근거도 없는 이데올로기, 아주 퇴폐적인 윤리의식을 마비시키는 내용, 이런 것들입니다.

 소비자의 책임을 왜 언급하느냐 하면 결국 어떤 사회에서 생산의 많은 부분은 소비자의 수요, 욕구투입이 반영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나쁜 책이 많이 팔리면 나쁜 작가·생산자가 많다고 생각하기 이전에 우리가 잘못 선택했고, 작가들에게 잘못 요구해서 그런 영향을 미친 것이 아닌가 하고 반문하는 정신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정리=김병찬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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