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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중의 군사지원(러 외교문서로 본 6·2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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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중의 군사지원(러 외교문서로 본 6·25:4)

입력
1994.07.2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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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년2월 남침무기 제공 개시/소 전쟁기술·물자원조 도맡아/중선 의용군 개사단 북이관 북한의 무력남침이 소련과 중국의 막대한 인적 물적 지원하에 이루어졌다는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이 부분에 대한 학계의 연구도 상당히 축적되어 있다. 이번에 공개된 러시아 외교문서는 남침의 준비과정에서 중소의 대북지원사실을 구체적인 자료로 생생히 뒷받침하고 있다.

 소련은 48년 2월 북한인민군의 창설부터 많은 대북군사지원을 했지만 남침을 전제로 한 소련의 본격적인 군사지원은 49년부터 시작된다.

 49년 2월4일자 러시아 외교문서철에는 구체적인 대북군사지원 내용을 설명하는 보고서가 포함돼 있다. 『소총탄 2백50만발, TT3용 탄알 3백20만발, 82 박격포탄 1만5천발, 소총 1천5백정, 자동소총 1천2백정, 권총 4백정, 중기관총 1백문, 82 박격포 40문을 적재한 소련 태평양함대 소속 함정이 북한으로 떠났다』는 내용이다. 49년 3월5일 모스크바에서 열린 스탈린―김일성회담은 남북한의 군사력을 평가하고 소련의 지원문제를 논의하는 자리였다. 북한의 박헌영외상도 참석했다. 러시아 외교문서는 이 회담의 대화내용을 요약해 놓고 있다.

 ―스탈린:남한에 있는 미군병력은 어느 정도인가.

 ―김일성:2만 정도다.

 ―스탈린:남에는 국군이 있는가.

 ―김일성:약 6만명이 있다.

 ―스탈린:(웃으면서) 강한가.

 ―김일성:강하지 않다.

 ―스탈린:북과 남 군대 중 어느 쪽이 더 강한가.

 ―박헌영:북쪽이 강하다.

 이 회담에서 김일성은 무력에 의한 남한점령 계획을 밝히면서 스탈린의 의견을 구했고 스탈린은 북한군이 남한군에 비해 절대적인 우위를 확보하지 못하는 한 공격해서는 안된다고 답변했다.

 김일성은 또 이 회담에서 북한군의 무기 및 장비구입을 위해 3천만달러의 차관제공을 스탈린에게 요청했다. 외교문서에 이 요청에 대한 스탈린의 답은 나와 있지 않다. 그러나 이때 무기구입을 위한 소련의 대북차관 제공문제가 상당히 심도있게 논의됐다고 미뤄볼 수 있는 자료는 많다. 49년 4월28일 주평양소련대사인 슈티코프가 본국에 보낸 전문이 대표적인 것이다. 슈티코프는 이 전문에서 『김일성이 북한군의 기계화계획 및 단순군사기술이전은 5월까지, 항공기술이전은 9월까지 완료해 줄 것을 요청하는 서한을 모스크바에 전해달라고 요구해 왔다』고 밝히고 있다.

 김일성은 또 다음 해인 50년 2월 북한 인민군 편제를 10개 사단으로 증강하기 위해 3개 보병사단을 추가로 창설하고 이 사단들을 무장시킬 수 있도록 차관을 제공해줄 것을 요청, 스탈린으로부터 동의를 받아냈다.

 소련이 군사고문단파견등 전쟁기술과 군수물자를 원조함으로써 북한군을 지원한데 비해 중국은 병력지원에 치중했다.

 러시아 외교문서에도 중국이 북한에 조선인 출신 의용군을 대거 지원하게 된 과정이 나타나 있다. 이 문서에는 김일성이 49년 5월14일 북한군 정치국장인 김일의 중국방문 결과를 설명하는 대목이 있다. 모택동이 김일에게 『3개 의용군 조선인사단중 목단·장춘지역에 배치된 사단을 즉시 이관하고 나머지 1개 사단도 중국남부에서 전개되고 있는 국민당과의 전투가 마무리되는 대로 곧바로 넘겨 주겠다』고 동의했다는 내용이다. 이 조선의용군은 인민군 제6사단, 제5사단 및 제7사단에 편성돼 남침 당시 인민군의 주력을 형성했다.<이계성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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