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평마을 조선족들 “고향땅이 갈수록 멀어져” 두만강 강역의 지명에는 유난히 볕양자나 남녘남자가 많다. 높은 지대와 강물의 영향으로 늘 냉한 지역이어서 마을이름이라도 따스하고 양지바르기를 바라서일까. 무산에서 하류쪽으로 5리쯤 내려가 층암절벽이 병풍처럼 막아선 강가에 오붓이 들어 앉은 남평도 지세로만 보면 얼핏 그런 곳인 듯 싶다.
그러나 정작 남평이라는 이름은 조선조 말의 부부생이별 설화에서 유래된 것이라고 한다. 민란을 일으켰던 한 남정네가 아내를 데리고 도망치다 두만강에 이르러 포졸들에게 쫓기던 끝에 혼자 강을 건넜다. 헤어진 부부는 그뒤 하루 한번씩 강가에 나와 『로덕(함경도 사투리로 부인)이 무사하오』, 『남편께서도 잘 계셨어요』하고 소리쳐 안부만을 주고 받으며 안타까워 했다. 이들 부부는 죽을 때까지 영영 만나지 못했다. 두만강 양켠의 산이 결코 강을 건너 만나지 못하는 것처럼.
강을 따라 길다랗게 형성된 마을의 8백여 가구 주민 대부분이 조선족인 남평에서는 오늘도 별리의 한이 쌓여 간다. 국경선을 사이에 두고 갈라진 혈육의 아픔은 이곳에서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정식 해관이 들어서 가까운 무산을 상대로 공식교역이 이루어지고 보따리장사들이 강 건너 「홍콩시장」에 드나든다. 지난해 연말까지만 해도 북한의 밀수차가 들어오던 주요한 통로이기도 했다. 하지만 경조사 때 강건너 고향땅을 이웃집 드나들듯 스스럼없이 왕래하던 불과 한 세대전의 기억에 비하면 갈수록 왕래가 힘들어지는 현실이 원망스러울 뿐이다.
마을어귀에서 처음 만나는 사람들, 볕바라기를 하던 노인들이 무엇인가 소식을 가져온 사람들을 반기는 표정으로 손을 흔든다. 골목의 양지쪽에서 행상들이 벌여 놓은 좌판이 발길을 잡는다. 각기 집에서 여유분을 내온 남새(야채)와 돼지고기등을 제법 풍성하게 늘어 놓았지만 정작 아낙들은 흥정보다는 수다떨기에 정신이 팔려 있다. 화제는 어디서나 그렇듯 남편, 자식얘기 따위의 시시콜콜한 것들이다. 두만강변에서 도시를 제외하고는 가장 큰 국경마을 남평의 풍경은 이렇듯 살가웠다.
마을 아래쪽 해관에서는 임시교량을 건설하는 공사가 부산하다. 거룻배로나 왕래하던 나루터여서 불편을 느껴온 북한측의 요청으로 4월초부터 시작된 공사다. 무장군인 3명이 지켜보는 가운데 크레인이 트럭에서 목재를 부리고 있고 인부 10여명이 교량을 엮느라 열심이다.
노을이 흐르는 강물에 지친 발을 담근다. 전국시대의 비극시인 굴원이나 당대의 길라잡이 유홍준교수가 읊은 탁족의 풍류는 아니더라도 저무는 강가에는 때아닌 흥취가 도저하다.
그러나 강변의 여유도 잠시, 일행이 강건너를 향해 사진을 찍으면서 사단이 벌어졌다. 북한측에 넘어가 있던 중국군인 하나가 북한측의 항의를 받고 얼기설기 엮인 다리를 황급히 건너왔다. 강폭이 불과 10여 안팎이어서 시야가 훤했던 탓이다. 발이 넓은 안내인이 나서 아는 사람들을 주워 섬기며 얼버무려준 덕분에 가까스로 카메라를 뺏기는 곤경은 면할 수 있었다.
국경의 밤은 일찍 찾아들었다. 마을의 소박한 여관방 술상머리에 둘러 앉은 남평주민들은 또 부평초처럼 떠돌아온 예의 한맺힌 삶을 저마다 풀어내기 시작했다. 강건너 무산의 여동생에게 인편으로 가끔 먹을 것을 부쳐준다는 얘기에 우울해하다가 1주일에 한번씩 쌀밥을 먹고 있으며 5년전에는 갈치를 먹은 적도 있다고 자랑했다는 북한의 당간부 얘기, 북한에는 핵무기가 이미 2개나 있는데 터뜨리면 양코배기만 죽는다고 믿고 있는 시골사람들 얘기에 실소가 터지기도 했다. 웃음조차 뒤끝은 늘 슬픔이다. 두만강변에서 만나는 조선족들과의 자리는 매양 이런 식이었다.
가까운 곳에 호곡영이라는 높은 고개가 있다. 바람이 불면 호랑이울음처럼 들린다는 고갯마루에 연변시단의 대부로 존경받는 이 욱(1907∼1984년)의 시비가 서 있어 더욱 유명해진 곳이다. 광복의 기쁨을 주체할 수 없었던 그는 이학성 , 월촌등 그동안 사용하던 필명을 새로운 해가 뜬다는 뜻에서 이욱으로 바꿨다. 그러나 시인의 개명에도 불구하고 두만강변에는 여전히 어둠이 걷히지 않고 있다.
◎어느 조선족변사의 인생유전/남한은 아버지고향·북한은 형수가 사는곳/자신은 중국떠돌이 “한민족수난사 축소판”
은퇴한 조선족변사 최영복씨(56)의 인생유전은 한민족수난사를 담은 한 편의 영화다. 밤이 깊어가는 강가의 객잔에서 최씨는 부초처럼 살아온 평생을 회고했다.
학창시절에 시낭송을 잘했던 최씨는 집안이 어려워지자 59년 중공의 대약진운동당시 영화종사원 모집에 응했고 화룡현 이동영사대에 소속돼 1백56개 마을을 영사기를 메고 다녔다. 영화가 문화생활의 전부였던 시대에 깊은 산골까지 찾아오는 최씨는 귀한 손님이었다. 들르는 마을마다 조촐한 잔치가 벌어지곤 했다. 지금도 화룡에서 그를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으며 중·노년층에게는 모든 주인공들의 성격을 대변하는 영화 그 자체나 다름없다. 64년에 「영화계통 전국모범」으로 선발돼 모택동주석을 접견했을 만큼 최씨의 영화인생은 성공적이었다.
그러나 영화밖의 삶은 고난의 연속이었다. 아버지는 남한이라는 것뿐 고향을 밝히지 않은채 그가 6세때 갑자기 숨졌다. 이후 최씨는 청산이전투에 참전했던 독립군외할아버지 슬하에서 자라며 자부심도 느꼈으나 문화혁명(66∼76년)때는 김좌진장군과 함께 찍은 외할아버지 사진 때문에 1년간 옥살이를 해야 했다. 하나뿐인 형은 50년 인민해방군에 입대, 한국전에 참전했다가 북한에 눌러 앉았다. 57년에 개성 근처에 살고 있던 형을 잠시 만났을뿐 형제는 그뒤 재회하지 못했고 78년에 뇌일혈로 세상을 등졌다는 소식이 날아왔다. 영화에 빠져 1년중 3백일 정도를 밖으로 떠돌 무렵에 죽은 큰 아들은 최씨의 가슴에 묻혀 있다.
최씨의 꿈은 갈라진 남과 북을 모두 가보는 것이다. 북에서는 형수와 조카를 만나고 남에서는 아버지의 고향을 만나야 한다.
□특별취재반
권주훈부장대우(사진부)
이준희기자(사회부)
이재열기자(기획취재부)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