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의불명확·전달자 「격」도 안맞아/단계회담·북핵해결에 우선 비중 박보희 세계일보사장이 평양을 방문한 뒤 『북한의 김정일이 미국을 방문해 클린턴대통령과 회담을 갖기를 희망한다』는 「김정일의 메시지」를 언론을 통해 밝힌데 대해 미국정부의 반응은 한 마디로 냉담하다.
미국정부는 언론사 경영자인 박씨의 입을 통한 이같은 메시지는 그 진의가 불분명할 뿐만 아니라 현재로서는 실현가능성이 희박한 「수사적 언급」으로 판단하고 있다. 이같은 반응은 지난 4월 김일성이 자신의 82회 생일 때 초대한 외국 언론인들에게 『미국에 가서 낚시와 사냥을 하고 싶다』고 말한 것으로 전해졌을 때 보인 태도와 별 차이가 없는 것이다.
앨 고어 미부통령은 24일(현지시간) NBC방송과의 시사대담 프로에 나와 김정일―클린턴회담 가능성에 대한 질문을 받고 『가까운 장래에 실현 가망성이 없는 제안』이라고 일축했다.
고어부통령은 『우리는 신문을 통해 외교를 하지 않는다』면서 미국은 내달 5일 제네바에서 재개되는 북미 3단계 고위급회담과 북한의 핵동결 약속 이행여부에 우선적인 관심을 쏟고 있다고 밝혔다.
고어부통령의 이런 발언은 북핵문제 해결의 진척도에 따라 북한과 단계적인 관계정상화를 모색한다는 클린턴행정부의 일관된 대북정책 기조에서 벗어나지 않은 것이다.
이처럼 김정일메시지에 대한 미국측의 1차적 반응은 소극적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는 미행정부가 메시지의 내용보다도 「박보희 세계일보사장」이라는 메시지 전달자의 격에 별다른 의미를 두지 않고 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방미희망이라는 김정일 메시지의 진의가 또다른 채널을 통해 좀 더 구체적으로 확인될 경우 클린턴행정부는 이번과는 달리 소극적 태도로 일관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미행정부는 북한에 강력한 지도자가 출현하는 것이 미국의 국익과 합치된다는 관점에서 별다른 불상사없이 진행되고 있는 김정일의 권력승계에 안도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김정일이 핵개발 포기를 비롯한 우호적인 대미정책을 채택하고 이를 내외에 확인시킨다면 미국으로서는 얼마든지 그를 끌어 안을 준비가 돼 있다고 보는 게 옳다.
더욱이 김정일이 박세계일보사장에게 밝혔다는 것처럼 남북정상회담의 개최가 「시간문제」라면 북미관계개선과 그에 따른 김정일의 방미문제는 더욱 구체성을 띨 가능성이 있다고 볼 수 있다.
국무부 관리들은 김정일의 방미의사 표명이 사실이라면 그의 순조로운 권력승계를 시사하는 또다른 신호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또한 김정일에 대한 서방 정보기관의 부정적 평가를 불식시키는 계기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들의 이같은 생각은 김정일이 지난 10여년간 북한의 개방실험에서 견인차 역할을 해왔다는 사실에 바탕을 두고 있다. 이들에 의하면 김정일은 동구가 몰락의 길을 걷고 있던 지난 91년 문선명 통일교교주와 박세계일보사장을 비롯한 통일교 관계자들을 북한에 불러들이는가 하면 경제특구 개발을 서두르는등 대외개방 작업을 배후에서 주도했다는 것이다.
미국의 일부 정보분석가들은 김정일의 지시로 문교주 일행의 방북 중개역할을 했다가 좌천된 뒤 김일성 사후 다시 부상중인 김달현 윤기복등 개혁파 관료들에 주목하면서 김정일체제의 본격적인 개막에 은근한 기대를 걸고 있다.
김정일체제의 대미관계개선 의지는 내달 재개되는 제네바회담장에서 미국측의 집중적인 시험을 받게 될 것이다. 김정일 메시지의 진의 여부도 그때가서 구체적으로 검증될 것으로 보인다.<워싱턴=이상석특파원>워싱턴=이상석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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