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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청으로 소나기를 들으며/박완서 칼럼(화요세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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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청으로 소나기를 들으며/박완서 칼럼(화요세평)

입력
1994.07.2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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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8도가 넘는 더위는 남쪽 내륙지방만의 일인 줄 알았더니 드디어 서울까지 그 더위가 북상했다. 열병을 앓는 사람의 체온이 우리 몸을 고루 감싸고 있는 셈이니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그러나 기상청에서 발표한 최고기온이란 백엽상 속의 자동관측기가 기록한 기온일 터이니, 서울에서 일상생활을 하면서 가장 덥게 느낀 장소나 시간의 온도는 그보다 훨씬 더 하다고 생각하면 더 끔찍해진다. 도시의 이런 고온현상을 콘크리트 건물과 아스팔트 길, 그리고 에어컨, 자동차등에서 배출하는 인공열들로 풀이하는 소리를 흔히 듣는다. 오후의 뙤악볕 아래서 보면 그 말이 맞는 것 같다. 하늘에서 내리쬐는 볕은 양산이나 건물의 그늘로 잠시 피할 수도 있지만 아스팔트와 고층건물에서 끼쳐 오는 열기는 출구없는 화덕 속이나 다름이 없다. 곧 쪄죽을 것 같아 살인적인 더위라는 말이 실감이 난다. 아무리 해가 진 후라고 해도 도시에 직립한 무수한 열기둥 속의 한 방에서 자는 잠이 편안할 리가 없다. 그러나 오후의 아스팔트길보다 더 뜨거운 데가 있으니 그곳은 한낮의 주차장이다. 도처에 차가 넘치는 세상이니, 자기 차가 있건 없건 차들이 늘어선 사이를 통과해야 할 일은 하루에도 몇번씩 있을 것이다. 그럴 때마다 느끼는 건데 열을 받은 차체에서 되쏘는 열기는 아스팔트보다 몇배 더 잔혹하다. 전국의 차량대수를 헤아릴 것도 없이 당장 눈 앞에 보이는 아파트 주차장이나 밀리지 않을 때가 없는 도로사정만 보고 짐작해도 길이라는 길이 아스팔트가 아니라 철판으로 포장됐다고 가정해도 크게 틀리지는 않을 것이다. 일전엔 오랜만에 시내에서 만난 친지의 차에 동승하기 위해 도시 한 가운데 있는 대형 주차장 한 가운데로 걸어 들어가야 할 일이 있었는데, 꼭 시뻘겋게 달아 오른 프라이 팬에 던져진 기분이었다. 비명을 지르며 도망치고 싶은 걸 가까스로 참고 겨우 찾은 그의 차에 오르려고 하자 잠시만 기다리라고 했다. 잠시 후 환풍을 하고 에어컨을 작동시켰다고는 하나 차 안의 더위 또한 굉장했다. 핸들이 펄펄 끓어 잡을 수가 없었다고 했다. 집이 같은 방향만 아니었어도 태워 주겠다는 그의 호의를 거절했으련만 하고 후회막급이었다. 이윽고 차 안은 어느 만큼 시원해졌지만 차가 밀리기 시작하자 평소 점잖고 말수가 적던 친지가 투덜투덜 욕을 하기 시작했다. 차들의 정체가 심해질수록 그의 입도 믿을 수 없을 만큼 험악해졌다. 마치 그도 어쩔 수 없는 고약한 힘이 그를 뚫고 들어와 그를 차지한 것처럼 그는 전혀 딴 사람이 되어 자신을 뺀 모두를 적으로 돌리고 으르렁거리고 있었다. 온 세상을 향해 적의를 곤두세운 그는 당연하게 외로워 보였다.

 비단 그 친지가 아니라도 남의 자가용이나 택시를 타고 가다가 교통혼잡을 만나거나 매너가 좋지 못한 딴 차 때문에 주행에 지장이 생겼을 때, 운전대 잡은 이가 돌연 난폭한 욕쟁이로 변하는 건 흔히 보는 일이다. 그럴 때는 자기만 옳고 딴 사람들은 다 형편없는 무법자에다 「놈」 아니면 「년」이 된다. 차가 편리한 것인지는 몰라도 존엄한 것은 아닐진대 차타고 앉았다는 이유 하나로 타인을 그렇게 저주·능멸해도 되는 것인지, 차가 편리하다는 기능 외에 인간의 심성에 미치는 그런 영향을 볼 때마다 나라도 차를 안 가진 게 참 다행이다 싶어진다. 남이 가지니까 나도 가져야 된다고 생각할 때는 차의 편리함만 보이지만 나라도 안 가져야지 하고 생각을 바꾸고 나면 안 가져서 편한 것이 한 두 가지가 아니다. 주차할 걱정 없지, 전철을 이용하면 시간 약속 못 지킬 까닭 없지, 출퇴근시간을 반 시간만 넘기거나 미리 타도 전철 안이 서늘하고 안락하기는 이 복 중에도 가히 천국이다. 설사 출퇴근시간이라 해도 사람들끼리 좀 부대끼기는 해도 저만 잘났다고 남을 미워하고 욕하는 일은 없다. 노인에게 자리를 양보하는 학생을 만날 수도 있고, 남이 업은 아기가 숨막힐까 봐 사력을 다해 버팅기고 섰는 청년을 만날 수도 있고, 시시콜콜한 사람 사는 얘기를 슬쩍슬쩍 엿들으면서 미소를 지을 수도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우리는 누구나 다 우리가 이렇게 무작정 차를 늘려서는 안된다는 것을 알고 있다. 나라도 안 갖는 것은 나라도 해서는 안 되는 일에 동조를 안 하는 짓일 수도 있다. 남이 가지니까 나도 가져야 된다는 생각 속에는 나 혼자 안 가져봐야 환경오염이나 교통체증해소에 무슨 도움이 되겠느냐는 생각이 깔려 있게 마련이지만 심한 교통체증도 한 두대의 차의 접촉사고나 염치없이 대가리를 잘못 들이민 단 한대의 차에 기인할 적이 많다. 나라도 그 한대의 차가 안 될 수 있다면 크나큰 공헌이 되는 셈이다. 환경오염도 마찬가지일 것 같다. 자연도 재기할 수 없이 죽는 마지막 선이 있을 테고 내가 무심히 흘려버린 한 줌의 합성세제 거품이나 오염물질이 그 최후의 보루를 무너뜨릴 수도 있다고 가정하면 나라도 안 하는 의식있는 행위가 얼마든지 위대한 일이 될 것이다.

 자정이 지나서야 가까스로 든 잠이 새벽녘에 쏴아 하는 소나기 소리에 깨어났다. 반가워서 허둥지둥 바깥을 살피니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에 동이 터오고 쏴아 소리는 마음껏 속력을 내는 차소리였다. 하필 차소리에 깰 게 뭐였을까. 비는 아니더라도 지친 나무들을 흔드는 바람소리라도 되었으면 좋았을 것을.<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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