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강대 박홍총장의 주사파관련 발언이 우리 사회에 큰 충격을 주고 있다. 그러나 그들을 직접 수사했거나, 조금이라도 관심을 가졌던 사람이라면 박총장의 발언이 새삼 충격을 줄만한 내용은 아님을 알 것이다.
오늘날 운동권의 북한노선 추종경향이나 주사파의 등장시기는 80년대 중반, 정확하게는 85년 7월 27일 북한이 과거 통혁당 방송을 이른바 「구국의 소리」방송으로 개편하면서부터다. 이때부터 북한은 「혁명의 주력군」을 과거의 노·농동맹에서 노·농·학동맹으로 배치하는 전술을 펴면서 우리 학생운동권에 큰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했다.
그해 겨울 어느날 모신문사 기자로부터 참으로 충격적인 얘기를 들었다. 청계천 7가 라디오 가게에서 단파라디오가 날개 돋친듯 팔려 동이 났다는 것이다. 어떤 집단이 북한방송을 체계적으로 청취하고 있음을 확신했다.
이 확신은 이듬해 3월에서 5월 사이 서울시내 3개 대학에서 구국학생연맹(구학연) 구국학생동맹(구학동) 애국청년학생회(애청회) 등 지하조직의 실체가 수사를 통해 밝혀지면서 확인됐다. 이들은 하루의 대부분을 「구국의 소리」방송 청취, 녹취, 유인물제작·배포 및 학습으로 보내면서 공개운동조직을 장악하기 시작했다.
80년대말과 90년대에 접어들어 그들은 보다 공개적, 집단적으로 적극적인 대북통신과 회합을 시도하고 있다. 그때나 지금이나 그들은 북한의 전략·전술론을 철두철미 맹종하고 있다. 자발적 맹종이야말로 지시나 지령에 대한 타율적 복종보다 더 위험한 것이다.
당시에도 검찰은 각종 지하조직에 대한 수사발표를 통하여 실상을 국민에게 충분히 알렸다. 그럼에도 일반국민들은 무관심했고, 대다수 지식인들마저 「단순한 용어상의 급진주의」나 「지적 호기심」의 차원으로 보고 별로 우려를 표시하지 않았다. 극소수의 성향을 마치 전체학생의 것인양 호도한다는 비난도 있었다.
한층 안타까웠던 것은 당시 정부의 정통성 시비와 맞물려 비판적 지식인들이 『선량한 학생들을 좌경용공으로 매도하면서 정권유지를 획책하고 있다』고 비난했던 사실이다. 이러한 우리 사회의 이데올로기적 무장해제를 틈 타 주사파등 극단주의자들은 북한의 대남전략·전술의 전위로서 우리 사회를 파괴하기 위한 투쟁에 착수한 것이다.
수사경험을 통해 극단주의자들의 머리는 「교환」이 곤란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아무리 처벌이 단호하더라도 그리스 신화의 히드라처럼 계속하여 출현하는 지속적 재생산체계를 갖고 있다. 따라서 국가 법의지의 표현인 형법적 대처방식은 가장 중요한 것이기는 하나, 유일하거나 궁극적인 수단은 못된다.
핵심세력에 대한 엄단의지와 아울러 그들을 둘러싸고 있는 환경과 그들이 기생하고 뿌리를 뻗는 사회적 토양을 제거하는데 보다 더 관심을 가져야 한다. 특히 지식인들의 역할이 그 어느때보다 절실하다.
독일의 경험을 살펴보자. 60년대 중반까지 독일의 학생운동은 국민의 주요 관심사였으며 세계 여론의 주시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60년대말과 70년대초에 이르러 교조주의적·폭력적 성향때문에 학생운동에 대한 관심이 현저히 쇠퇴하자 일부 극단주의자들은 대중의 관심을 끌기 위하여 한층 전투적인 모습을 띠게 된다.
당시 독일도 우리와 마찬가지로 일부 지식인들은 그들에게 동정을 보냈을 뿐 아니라 선동 격려하기까지 했다. 유명한 여성 칼럼니스트 올리케 마인호프와 변호사 호르스트 말러는 바더 마인호프테러그룹의 핵심이 되었다.
작가 하인리히 뵐은 이들의 테러활동이 극한을 치닫던 71년 1월 슈피겔지에서 바더 마인호프그룹과 국가간의 관계를 「6명대 6천만명의 전쟁」이라고 표현하면서 『절망적인 6명에 대하여 은사를 베풀지는 못할망정 파시즘과 다를바 없는 선동과 언론재판을 해서는 안된다』는 취지의 글을 써 다수 지식인들과 언론의 호된 질책을 받았다.
결국 72년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독일정부는 국민의 전폭적 지지아래 대대적인 검거활동을 전개, 바더 마인호프조직원 모두를 체포했다. 호르스트 말러는 후일 다음과 같이 고백했다.『당시 우리는 국가의 무서운 통합력외에는 아무것도 두렵지 않았다』
물론 「획일성」을 갖자는 것은 아니다. 의견의 다양성은 존중되고 장려되어야 한다. 세계관과 양심에 따라 동정과 관용을 호소할 수도 있다. 그러나 실상이 분명해진 지금, 다양성이 존중되는 우리의 민주주의를 수호해야 한다는 당위에 이견이 없는 절대다수 국민의 결속이 요구된다.
이러한 의미에서 박총장의 발언을 계기로 형성된 지지와 비판의 상반되는 입장들은 우리 사회의 대립과 갈등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한 차원 높은 우리사회의 통합을 이루어 내는데 불가피한 진통이라고 할 수 있다.<서울고검검사>서울고검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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