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양점령」시점에도 파병주저/“미에 승산없다” 당서 반대결의/모 “중도 위협”주전파견해 수용 50년 10월1일 스탈린은 북경주재 로신대사를 통해 모택동에게 긴급 전문을 보냈다. 『북한의 입장이 몹시 난처하다는 것을 알았음. 9월16일에 행해진 미군의 인천상륙작전은 북한 제1, 제2병단을 후방과 끊기 위한 목적임. 중국 의용군을 보낼 수 있다면 빨리 5∼6개 사단이라도 38선에 진출시켜야 할 것임』
10월3일 로신대사는 모택동의 회신을 스탈린에게 보고했다. 모택동은 『처음에 우리는 적군(미군)이 38선을 넘을 시점에 중국 의용군 수개 사단을 투입할 생각이었으나 지금은 당분간 지켜보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됨. 북한측은 유격전으로 이행하면 될 것임. 필요하다면 귀하(스탈린)의 휴양지에 주은내와 임표를 보내도록 하겠음』이라고 밝혔다.
러시아가 공개한 6·25외교문서는 10월3일까지 중국은 참전을 결정하지 못하고 있었음을 밝히고 있다. 그동안의 일반론은 10월2일 모택동이 당정회의에서 참전을 결정했으며 10월4일 중국공산당과 각 당파와의 연합회의가 있었고 여기서 「한국사태에 대한 공동선언문」이 채택된 것으로 돼 있었다.
그러나 공개된 외교문서에 의하면 10월 중순까지 중국은 의용군의 파병을 결정하지 못했다. 10월14일 로신대사가 스탈린에게 보낸 전문은 『모택동이 의용군을 파견하는 것이 유리하다고 언급했음. 주은내(며칠전 모스크바에 비밀리에 급파돼 있었음)에게 파병과 관련된 문제를 스탈린과 협의토록 지시를 내렸음』이라고 돼 있다. 이어 주은내는 모택동에게 『필리포프동무(스탈린의 암호명)가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 정치국의 「조선파병 반대결의」에 이의를 표명하지 않았음』이라고 보고했다(10월중순).
이번에 공개된 소―중간의 「비밀전문」을 종합해 보면 중국은 한국군이 38선을 돌파한 10월1일 이후에도 정규군의 파병을 주저하고 있었다. 모택동은 10월5일 미군이 38선을 돌파해 북진을 시작하고 19일 연합군이 평양을 점령할 때까지 중국은 참전을 결정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오히려 중국공산당은 김일성과의 약속을 저버리고 파병반대를 결의해 놓고 있었던 것이다.
이에 앞서 8월 26일 스탈린은 자신의 특사를 북경에 밀파했다. 스탈린은 특사를 통해 모택동에게 『김일성을 구원하기 위해 평양에 원군을 파견하는 것이 좋겠다. 중국이 원군을 보낸다면 소련은 무기원조를 담당하겠다』고 제의했다. 9월초 김일성은 허가이와 박일우를 북경에 급파했다. 모택동은 사절단에게 『검토하겠다』고 말한뒤 당·정·군 최고지도자들과 토론을 거듭했다. 이 토론은 10월중순까지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
당시의 토론과 모택동의 결론은 이번에 공개된 외교문서에 잘 나타나 있다. 이 문서는 북경주재대사가 10월24일 스탈린에게 보낸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주은내는 조선사태가 중국에 미치는 영향에 관한 보고서를(회의에) 제출했음. 지도자중 몇몇은 중국은 약하고 미국은 강하다는 점에 우려를 표명하고 미국이(중국에) 전쟁을 선포하는 경우 중국은 패배할 것이라는 의견을 피력. 모택동이 결론을 말했는데 그는 조선을 중국의 문턱으로 간주한다고 말하고 일본이 조선 강점을 중국침공의 교두보로 이용했음을 언급하면서 중국정부는 중국안보에 심각한 위협을 야기할 미국의 조선장악을 용인할 수 없다고 말함』 결국 모택동은 주은내와 유소기등 당정쪽의 참전반대론을 물리치고 임표와 팽덕회등 군부 주전파들의 견해를 수용한 것이다.
모택동은 유엔군의 북진을 보면서 미국과의 직접교전을 더 꺼렸을 것이다. 그러나 이같은 상황이 참전의 필요성을 역으로 가중시켰던 것이다. 모택동과 함께 마지막 순간에 참전쪽으로 선회했던 주은내는 당시 『1천에 달하는 압록강을 사이에 두고 미국과 대치하려면 얼마나 많은 병력이 필요할 것인가. 더구나 거기서 우리는 언제 침입할지 모르는 적을 매년 기다릴 수밖에 없지 않은가』라며 참전의 「실용성」을 설명했다.<정병진기자>정병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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