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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미 「물고기의 축제」/이혜경 연극평론가(연극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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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미 「물고기의 축제」/이혜경 연극평론가(연극평)

입력
1994.07.2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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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의 얕은 물에 갇혀버린 수작 『글을 쓰지 않으면 숨을 쉴 수 없다』

 26세의 재일교포 작가 유미리가 글을 쓰는 이유다. 재일교포로서 일찌감치 익숙해진 모멸감과 소외감, 도박에 빠진 아버지와 카바레에서 일하던 어머니와의 불화, 중학교때 어머니의 불륜을 목격한 충격으로 시달린 호흡곤란과 언어장애, 일곱번이나 시도했던 자살등 삶의 거친 풍랑속에서 구명대에 매달리듯 절박하게 글을 쓰며 살아남은 그녀는 마침내 땅을 딛고 자신이 지나온 바닷속 풍경에 대해 이야기한다.

 「물고기의 축제」는 유미리에게 2년전 일본의 권위있는 기시다(안전) 희곡상을 안겨준 대표작으로 자전적 작품이다. 부모의 불화로 흩어진 가족을 한자리에 모으기 위해 막내아들은 사고사를 가장해 자살을 하고 장례식을 위해 12년만에 한자리에 모인 식구들은 각자의 상한 심령을 움켜쥐고 그동안 쌓아온 그리움 증오 연민등을 드러낸다. 사실주의적인 구성, 간결하고 일상적인 대사, 마치 예상하고 있었던 일인양 담담하게 장례를 치러내는 식구들의 모습, 그러나 가장된 일상 밑에 흐르는 다양한 감정을 풍부한 시각적 이미지와 상징을 사용해 표현한 작가의 상상력과 연극성이 돋보이는 수작이다.

 8월16일까지 성좌소극장에서 공연되는 이 작품에서 연출 윤광진은 애석하게도 극의 내용을 전달하는 것으로 그치고 일상의 수면밑에 흐르는 갈등의 맥은 짚어주지 못하고 있다. 잠재력이 있는 배우들에게 충분한 동기를 부여하지 않아 각자의 인물들에게 녹아지지 못하고 겉도는 모습들이 안타깝고, 이학순의 무대장치 또한 갈색의 색조와 질감은 극의 분위기와 잘 어울리지만 디자인은 지나치게 추상화되어 어색하고 혼란스럽다. 희곡의 시각적 상징과 섬세한 감정의 표출을 억제한 것은 연출이 이 화제작을 놓고 한가족의 개별적 이야기를 뛰어넘어 보편성을 끌어내야 한다는 부담감에 지나치게 긴장한 탓인 듯하다. 그러나 과연 연극의 보편성이 희곡의 요구와 동떨어지게 연극적 요소들을 추상화하고 중화하는 것으로써만 이루어지는 걸까?

 마치 깊은 바닷속 무진장한 빛깔과 모양의 바위와 해초속에서 날렵하게 숨바꼭질하는 물고기들을 끌어다가 연안의 얕은 물에 가둬놓은듯 갑갑함을 느끼게 하는 공연이다. 하지만 미진한 무대화에도 불구하고 욕심부리지 않고 정직하게 꾸려가는 작가의 역량은 여전히 빛을 발하고 있어 그녀의 다음 작품 「해바리기의 죽음」을 기대하게 한다. 자신의 상처와 사색을 두서없이 사변적으로 내뱉는 것을 창작이라 여기는 우리의 젊은 극작가들에게 특히 권하고 싶은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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