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5까지 과업완성”개전일 역산/「장마전 휴일」 자연적요인 감안/군수품분배 완료시기도 일치 1950년 6월 25일(일요일) 이른 새벽, 38선 일대에는 가랑비가 내리고있었다. 주말을 맞아 38선 이남의 아군 전선은 많은 병사들이 외출 외박을 나간 상태였고 나머지 병사들도 일부 경계병을 제외하고는 깊은 단잠에 빠져있었다.
「쿠―응 쿵! 쿠―응 쿵쿵쿵쿠―응」
서쪽의 옹진반도에서 동쪽의 양양해안에 이르는 1백55마일 전선에서 1백22밀리 중포와 1백20밀리 박격포등 1천6백문의 각종 포가 남쪽진지를 향하여 일제히 불을 뿜었다. 총공격 개시에 앞선 북한군의 준비포격이었다.
이렇게 시작돼 3년1개월여동안 민족을 죽음과 파괴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었던 6·25. 이 민족비극의 시작일은 어떻게 택일됐을까.
이번에 공개된 6·25관련 러시아외무부 문서에는 6·25개전일이 6월말로 잡히게된 배경을 엿볼수 있는 대목이 있다.
『김일성은 그의 총참모장이 소련의 고문관 바실리예프장군과 공동으로 공격작전에 관한 기본계획을 완성했다고 통보해왔다. 그리고 김일성은 그 계획을 승인했다. 모든 편성과 준비는 6월1일 완료된다.…김일성은 6월말에 전투개시를 희망하고있다. 그 이유는 첫째 시일을 더끌면 북한군의 전투준비정보가 남쪽에 입수될수있고 둘째, 7월에는 장마가 시작된다는 것이다. 본인도 6월말에 작전을 개시 하는 것에 동의한다.조선인들은 휘발유와 의약품들을 요청하고있다. 조속한 지시요망』
50년5월30일 평양주재 러시아대사인 스티코프가 스탈린에게 보낸 전문내용이다. 스탈린은 곧바로 답신을 보낸다.
『이곳에서는 당신의 건의를 승인함. 의약품과 원유는 곧 받게될 것임』
남침에 대한 스탈린의 최종 승인은 이렇게 간단했다.
이 문서에 의하면 남침개시가 6월말로 잡힌 것은 장마라는 자연환경적 요인이 크게 작용한 것으로 풀이된다. 공격개시일이 구체적으로 6월25일로 된 것은 일요일인 이날이 기습공격 효과를 극대화할 수있었기 때문이었다. 또 이날은 북한에는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결성 1주년이라는 상징적 의미도 있었다.
그러나 남침전쟁의 시작이 6월말로 잡힌데는 이처럼 자연환경 때문만은 아니었다. 6·25전쟁연구 전문가들은 개전일 결정에는 기상요인외에 김일성의 정치적 필요성에 따른 일정과 군사적인 요인등이 작용한 것으로 분석하고있다(「한국전쟁사」제2권, 전쟁기념사업회).
우선 50년 8월 15일까지 한반도에 조선노동당 주도의 공산정부를 수립해야겠다는 김일성의 정치적 필요성 부분이다. 김일성은 49년이래 공공연히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북한 주도하에 한반도를 통일하겠다고 주장해왔고 50년 신년사에서는「금년내에」조국통일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해방 5주년이 되는 이해 8·15에 통일정부수립을 선포함으로써 적화통일의 정치적 효과를 극대화 하려고 했다는 것이다. 그는 8·15에 통일정부를 선포하기 위해서는 선거등에 최소한 1개월이 필요하다고 보았고 그러기 위해서는 남한을 평정하는 군사작전이 7월15일께 대략 끝나야한다는 계산이 나온다. 김일성과 소련군 군사고문단은 남한점령에 필요한 작전일수를 20일정도로 판단했다(애치슨미국무장관은 이해 1월 극동방위선에서 한반도를 제외한다고 선언했으며 김일성은 남침시 미군이 참전하지않을 것으로 오판하고있었다). 7월15일에서 역산하면 대략 6월25일이 된다.
개전일 결정에 영향을 미친 또하나의 요소는 남침준비를 위한 군사적 준비정도였다. 북한은 이미 48년부터 소련의 막대한 인적 물적 지원을 받아 군사력을 급격히 늘려왔지만 남침을 위한 마지막 전력보강으로 3개예비사단의 전력화,제 7사단의 창설, 소련으로부터 전쟁물자반입등이 4월말까지 끝나게 되어있었다. 이를 작전개시 상태로 최전선까지 분배하려면 적어도 1개월 반이상이 소요되는데 이 시점이 대략 6월중순에서 하순이었다는 것이다.
결국 이같은 3개의 조건이 맞아떨어진 6월25일 새벽 치밀한 사전준비를 마친 북한군은 38선 전 전선에서 일제히 남침을 개시했던 것이다.<이계성기자>이계성기자>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