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크메르루주군 무장대치 여전/하루도 총성없는날 없다” 태국과의 국경에 인접한 캄보디아 제2의 도시 바탐방에 있는 한 캄보디아 정부군 부대. 연병장 한복판에는 6월의 뜨거운 뙤약볕 아래 흉칙하게 쪼그라진 인두 서너개가 진열돼 있다. 바로 얼마전 이 부대가 크메르루주 게릴라 소탕작전 끝에 수확한 「자랑스런」 전리품이라고 한 장교는 말했다. 그러나 여기에는 속다른 사정이 있다.
번번이 크메르루주군의 매서운 공세에 겁을 먹고 달아나는 정부군의 사기를 진작키 위해 부대장이 고심 끝에 이같은 조치를 취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
『정부군은 팔린에서 바탐방까지의 서부전선에서 크메르루주의 공세에 크게 고전하고 있다. 이 지역에선 8백명의 크메르루주 게릴라에 쫓겨 8천명의 정부군이 후퇴에 후퇴를 거듭할 정도다』 정부군의 람 홈중령은 『지난 20년간 계속돼온 캄보디아 내전은 또다른 분수령을 맞고 있다』면서 조용히 귀띔했다.
「킬링필드」의 망령은 이처럼 아직도 캄보디아를 떠돌고 있다. 지난 75년부터 3년간 1백50만명의 캄보디아 국민을 무참히 학살했던 크메르루주의 기세는 여전히 드세기만 하다.
『특히 총선 1주년과 우기에 들어선 지난 5월말부터 크메르루주 게릴라의 테러는 더욱 극에 달하고 있는 느낌이다. 이웃 베트남과 아세안국가들은 경제번영을 위해 도약중인데 반해 우리는 언제나 내전의 소용돌이에서 벗어나게 될는지 답답할 뿐이다』 지난 3월까지 북동부지역에서 크메르루주 소탕작전을 벌이다 수도 프놈펜으로 전출된 캄보디아 정부군의 한 장교의 넋두리다.
현 캄보디아사태는 마치 유엔감시하의 총선이 실시된 작년 5월 이전으로 되돌아간 듯하다. 수도 프놈펜에서조차 백주에 크메르루주 게릴라로 추정되는 무장괴한들이 권총을 난사하는 사건이 비일비재하다.
『경제발전을 위한 정부의 노력이요? 지방도로를 달리는 운송트럭이 크메르루주의 로켓포 공격에 풍비박산나는 지경인데 무슨 경제시책이 필요합니까. 우선 크메르루주와의 내전을 종식하는게 캄보디아의 최대 현안입니다』 캄보디아에서 차량판매를 하는 싱가포르인 미첼 얍씨의 설명이다.
작년 5월 유엔감시하의 총선을 통해 출범한 라나리드정권도 심각한 위기의식을 느끼고 있다. 지난 5월 27일 평양에서 가진 휴전협상을 통해 크메르루주측에 무조건적인 휴전실시를 호소하다시피 했지만 크메르루주측은 이를 거부했다.
태국국경에 근거지를 둔 크메르루주의 내부사정도 좋은 것은 아니다. 「킬링필드의 살인마」이자 크메르루주의 수장인 폴 포트가 중병으로 위독한 것으로 알려진 가운데 「권력진공」을 메우기 위한 내부의 세다툼이 심각한 것으로 전해졌다. 또한 유일한 배후세력인 중국이 미국등 서방의 견제로 크메르루주지원을 꺼리면서 무기를 구입할 자금마저 바닥난 형편이다.
하지만 14만명의 정규군을 보유한 라나리드정부가 4만명 병력규모의 크메르루주에 밀리고 있는 이유는 하나다. 국론분열 때문이다. 제1총리 라나리드와 제2총리 훈 센의 세력반분에 따른 내분으로 조용할 날이 없고 군대기강 또한 해이하기 짝이 없다. 『캄보디아군은 엄밀히 말해 군대가 아니다. 사병이 장성을 죽이고 장성은 보직을 이용해 개인축재에만 열을 올린다. 대포와 탱크로 무장한 캄보디아 정부군은 돈과 총마저 없는 크메르루주를 소탕할 여력이 없는 것이다』 혼미한 캄보디아사태를 보는 한 서방인의 진단이다.<프놈펜=이상원기자>프놈펜=이상원기자>
◎킬링필드/폴포트 정권 4년간 만행/캄보디아인 백50만 학살
캄보디아인에게 가족관계를 질문하는 것은 삼가야 한다. 캄보디아인 대부분이 70년대 후반 폴 포트정권에 의해 저질러진 대량학살의 비운을 간직하고 있기 때문이다.
폴 포트가 이끄는 크메르 루주군이 미국의 지원을 업은 론 놀정권을 무너뜨리고 정권을 잡은 것은 지난 75년4월. 폴 포트는 곧바로 소위 모택동주의에 근거한 사회개조작업에 착수, 79년 1월 베트남의 캄보디아 침공으로 축출될 때까지 1백50만명에 이르는 캄보디아인들을 학살했다. 중산층은 물론이고 외국어를 조금이라도 구사할 줄 아는 사람들을 「베트남의 첩자」라는 혐의를 걸어 처형했다.
프놈펜시에서 포캄보르라는 길을 따라 남서쪽으로 약 15 떨어진 곳에 있는 「킬링필드」는 폴 포트정권의 만행이 압축되어 있는 곳이다.
킬링필드는 한가한 농촌풍경이 펼쳐지는 논 한가운데에 있다. 어린이와 부녀자를 포함한 1만7천여명의 캄보디아인들이 학살됐다고는 생각할 수도 없을 만큼 평화롭기 그지없는 곳이다.
그러나 크메르 루주군은 이곳에서 권총, 죽창으로도 모자라 곡괭이와 낫으로 동족 살해에 나섰다. 가로 세로 8도 되지않는 구덩이에서 캄보디아인 사체 2백여구가 포개진 채 발견되기도 했다. 영화에서 보았던 장면이 전혀 거짓이 아니었다.
크메르 루주는 이곳에 모두 1백29개의 구덩이를 파 시체를 파묻은 것으로 파악되고 있으나 현재까지 발굴된 것은 86개뿐이다. 수습된 두개골은 8천개로 1988년 건립된 위령탑에 연령·성별로 구분돼 일반인이 잘 볼 수 있도록 투명유리벽안에 보관돼 있다.
아직도 희생자들의 유골이 나뒨굴고 있는 킬링필드 주변에는 아무 사연도 모르는 듯 어린이들이 천진난만하게 뛰어놀고 있어 보는 이들의 가슴을 아리게 한다.
킬링필드에서 학살된 희생자들은 학살당하기 전 먼저 프놈펜시 아카르 미엔가 113번 거리에 있던 「S21수용소」에 수용됐었다. 지금 이름은 「투올 슬렝」박물관. 이 수용소는 원래 투올 싸이 프레이고등학교였다. 크메르 루주군은 이 학교 교실을 개조, 벽돌로 칸막이를 만들어 겨우 1명이 누울 수 있는 공간을 만든 뒤 쇠사슬로 양민을 묶어 가뒀다. 물고문과 사지를 찢는 고문등이 자행됐다. 79년 베트남군의 프놈펜 함락시 수용소에서 살아있다 구조된 사람은 단 7명이었다.
이 수용소 안에는 벽마다 희생자들의 사진이 걸려 있고 희생자들의 두개골로 만든 캄보디아지도가 섬뜩한 느낌을 준다. 아버지가 크메르 루주군에 의해 학살당한 렌터카 운전사 프얀씨(28)는 『킬링필드와 이곳 수용소는 동양의 아우슈비츠수용소』라며 『다시는 이런 일이 벌어지지 말아야 하는데 아직 크메르 루주군과의 내전이 종식되지 않아 걱정』이라고 한숨지었다.<프놈펜=황상진기자>프놈펜=황상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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