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스탈린 진의 확인후에 계획 협조/김 “공격은 6월… 준비될지 자신없다” 정부는 20일 러시아가 우리측에 넘겨준 6·25관련 외교문서를 공개함으로써 남침에 대한 분명한 증거를 제시했다. 6·25가 남침임을 확인해주는 이 외교문서는 6·25직전 김일성과 스탈린, 김일성과 모택동의 회담내용등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있다. 당시 오간 대화 및 전문내용은 6·25가 김일성의 요구에 스탈린과 모택동이 동의함으로써 발발했음을 단적으로 드러내고있다. 6·25직전 북한 소련 중국 3국은 긴밀한 공조체제를 갖추면서 침공작전과 미군개입시의 대책등을 구체적으로 마련했다. 모스크바와 북경에서 비밀리에 이뤄진 남침계획 논의 과정을 살펴본다.<편집자주>편집자주>
○49년초에 처음 협의
이 외교문서는 49년 3월5일 김일성과 스탈린의 모스크바회담에서부터 남침이 구체적으로 논의됐음을 보여주고있다. 김은 이 자리에서 남한에 대한 무력침공과 무력에 의한 조선통일에 관해 소련지도부의 의견을 물었다. 당시 스탈린은 북한군이 남한군에 대해 절대적인 우위를 확보하지 못하는 한 공격해서는 안된다고 답변했다. 스탈린은 이밖에 북한의 남한에 대한 공세적 군사활동은 남한의 침략을 격퇴시키는 경우에만 이뤄질 수 있다고 강조했다. 6·25 1년여전만해도 소련은 아직 남침에 적극성을 보이지 않았다. 김일성은 그러나 북한지도층은 무력으로 통일을 하자는 분위기라고 전했다.
6·25직전 김일성은 스탈린과 모택동을 차례로 만나 남침계획을 밝히고 지원을 요청했다. 소련외교문서는 회담록과 주중 및 주북한대사로부터의 보고를 통해 이같은 사실을 분명히 밝히고있다.
50년4월 김일성은 박헌영과 함께 모스크바에서 스탈린을 만났다. 이때 스탈린은 1년전과는 달리 국제환경이 유리하게 변하고 있음을 언급하고 북한이 통일과업을 개시하는데 동의한다고 밝혔다. 남침에 동의한 것이다. 다만 김과 스탈린은 이 문제의 최종결정은 중국과 북한에 의해 공동으로 이뤄져야하며 만일 중국이 부정적이면 결정을 연기하기로 합의했다. 이에 앞서 김일성은 슈티코프주북한소련대사를 통해 자신과 박헌영이 비밀리에 스탈린을 만나고싶다는 뜻을 모스크바에 전했다. 김과 박은 회담을 마친후 4월25일 평양으로 돌아왔다.
모스크바회담이후 북한 소련 중국 3국간의 남침논의가 활발히 진행됐음이 이번 외교문서를 통해 명백히 드러났다.
우선 슈티코프소련대사는 5월12일 김일성과의 면담결과를 본국에 보고했다. 면담에서 김은 50년6월께로 예정하고있는 남침계획을 구체적으로 수립하라는 지시를 북한군 총참모장에게 시달했다고 언급했다. 김은 또 작전은 6월에 개시될 것이나 그때까지 준비가 완료될지 자신이 없다고 말했다.
50년 5월13일 김일성과 박헌영은 모택동과의 회담을 위해 북경에 도착했다. 김이 스탈린의 얘기를 전하자 모는 소련측에 스탈린 자신으로부터 설명을 듣고싶다고 요청했다. 스탈린은 다음날인 5월14일 특별전문을 보냈다. 『국제정세의 변화에 따라 통일에 착수하자는 조선사람들의 제청에 동의한다. 그러나 이 문제는 중국과 조선이 공동으로 결정해야할 문제이고 중국동지들이 동의하지 않는 경우에는 다시 검토될 때까지 연기되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5월15일 모는 김일성 및 박헌영과 구체적논의에 들어갔다. 김은 이 자리에서 3단계계획을 수립했다고 밝혔다. 제1단계는 군사력을 준비하고 이를 증강하는 방안이었다. 2단계는 평화통일에 대한 대남제의를 하고 3단계는 남한측의 평화통일제의 거부후 전투행위를 한다는 내용이었다. 모는 이 계획에 찬성을 표명하고 몇가지 권고사항을 언급했다.
○모 “신속한공격” 권고
모택동은 계획된 작전을 위해 치밀한 준비가 필수불가결하며 북한군이 신속히 행동해야한다고 충고했다. 주요도시를 포위하되 이를 점령하기위해 지체해서는 안되며 적군의 병력을 섬멸하기 위해 군사력을 집중해야한다고 말했다. 모는 특히 만일 미군이 참전한다면 중국은 병력을 파견해 북한을 돕겠다는 뜻을 밝혔다.
소련은 미국과 38선 합의가 있기 때문에 전투행위에 참가하기가 불편하지만 중국은 이런 의무가 없다고도 말했다. 모는 일본군의 개입가능성을 물었으나 김일성은 일본군참전 가능성은 별로 없지만 참전할 경우 북한군은 더욱 맹렬히 전투에 임할 것이라고 답변했다. 모는 이와 함께 중국과 북한의 국경에 중공군의 추가배치나 무기 및 탄약의 공급이 필요한지 여부를 물었으나 김은 감사를 표시하면서 이를 사양했다.
북경회담후 소련은 5월16일 남북통일후의 상황을 염두에 둔 전문을 주북한대사관에 보냈다. 스탈린이 서명한 이 암호전문은 통일후 중국과 북한간에 우호동맹 및 상호원조조약을 체결하는데 동의한다는 내용이었다.
6·25를 채 한달도 남겨놓지 않은 시점인 5월29일 김일성은 슈티코프소련대사에게 4월 모스크바회담에서 합의된 무기와 기술이 대부분 북한에 도착했다고 통보했다. 당시 김의 지시에 의해 북한군 참모장이 소련군 바실리예프장군과 함께 남침공격계획을 수립했고 북한지도부도 이를 승인했다. 김은 6월말에 전투행위를 개시하는 것을 선호한다고 말했다.
그 이후는 시기적으로 적절치 못하다고 언급했다. 김은 그 이유로 첫째 북한군의 전투준비에 관한 정보가 남쪽에 입수될 수 있으며 둘째 7월에는 장마가 시작된다는 점을 들었다. 슈티코프대사는 김과 면담한 후 소련군 바실리예프장군 및 포스트니코프장군과 의견을 교환했다. 그들은 7월에 공격을 시작하는 것이 가장 시의적절하지만 일기관계로 6월로 변경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암호전문 해독 말라
6월16일 소련대사는 북한군 총참모부가 작성한 3단계침공작전계획을 모스크바에 보고했다. 소련대사는 또 6월20일 모스크바에 북한군의 수륙양용 작전용 선박공급을 요청했다. 6월22일 소련은 주북한대사관에 암호전문해독은 바람직하지 못하므로 일체의 암호전문을 해독하지 말라고 지시했다.<정광철기자>정광철기자>
◎남침입증 3가지문서 내용<요지>요지>
외무부는 20일 6·25남침을 결정적으로 확인해주는 김일성과 박헌영의 친서외에 또다른 결정적 입증자료로 다음의 3가지 문서도 같이 공개했다. 다음은 이들 문서의 요지.
김일성·스탈린회담관련 내부보고서 요지=1950년 4월 스탈린은 국제환경이 유리하게 변하고있음을 언급하고 북한이 통일과업을 개시하는데 동의. 이와 함께 이 문제의 최종결정은 중국과 북한에 의해 공동으로 이루어져야하며 만일 중국측의 의견이 부정적이면 새로운 협의가 이루어질 때까지 결정을 연기하기로 합의.
김일성·모택동면담에 관한 전문(로신주중소련대사의 스탈린에 대한 보고.50년 5월13일)=금 5월13일 23시30분 주은래가 본직을 방문, 모택동의 위임을 받아 하기사항을 전달함. 1, 김일성과 박헌영외무장관이 5월13일 북경에 도착했음. 2, 저녁에 모택동이 그들과 만났음. 면담중 북한대표단은 모택동에게 스탈린의『현재의 상황은 과거와 다르므로 북한이 행동을 개시할 수 있다. 그러나 문제는 중국측, 특히 모택동과의 협의를 반드시 거쳐야한다』는 지시사항에 대해 보고하였음. 3, 북한대표단은 북경에 2일간 체류예정임. 이와 관련, 모택동은 스탈린동지 본인의 입장을 조속히 알고자 한다함.
스탈린의 모택동에 대한 메시지(50년 5월14일)=모택동동지! 북한동지들과의 면담시 본인은 변화된 국제상황에 따라 북한측이 통일과업을 개시하겠다는 제안에 동의하였음. 이와 관련, 이 문제는 중국측과 북한측의 공동합의에 의해 최종결정돼야 할 것이라는 전제조건을 달았음. 만약 중국측과의 의견불일치가 발생할 경우에는 새로운 협의시까지 이 문제의 결정은 연기돼야 한다고 하였음. 자세한 사항은 북한동지들이 귀하에게 설명할 것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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