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정국 좌·우·중도파 3명 “묘한 하루” 김일성의 장례식이 치러진 19일은 공교롭게도 우남 이승만과 몽양 여운형의 기일이었다. 3인은 해방이후 한국현대사에 영욕의 자취를 남긴 좌·우파 및 중도파의 우두머리. 민족분단의 운명도 모른채 해방정국 3년을 좌지우지했던 세사람의 추모식과 장례식이 남북한에서 동시에 열린 것은 기연이다.
우남 이승만박사 기념사업회는 상오10시 서울 동작동 국립묘지 현충관에서 8백여명의 추모객이 참석한 가운데 29주년 추모행사를 가졌다. 예년에는 가족끼리 조촐하게 치렀으나 올해는 6월말 기념사업회가 발족돼 규모가 커졌다.
오재경기념사업회 회장은 추도사에서 『이박사는 위대한 독립운동가이자 공산주의를 막아낸 민족의 지도자였다』고 회고하고 우남의 큰 뜻을 이어받아 나라와 민족을 사랑하자고 말했다.
몽양 여운형선생추모사업회도 하오1시 서울 도봉구 우이동묘지에서 47주년 추모식을 올렸다. 참석자들은 몽양선생의 애국충정과 독립정신을 기리며 민주적인 조국통일을 기원했다.
우남은 미국과 하와이 등지에서 독립운동을 하다 광복후 귀국, 우파진영의 최고지도자로 각광받았다. 48년 제헌국회의원에 무투표당선되어 국회의장에 선출된후 이해 7월 초대대통령에 당선된 우남은 강력한 반공배일주의자였다. 그러나 자신의 장기집권을 위해 자유당을 만들어 여러차례 불법적인 개헌을 하다 4·19혁명으로 실각, 하와이에 망명한후 65년 그곳에서 운명했다.
몽양은 좌우파의 주도권쟁탈전이 치열하던 해방정국의 틈바구니에서 통일민족국가를 지향하던 중도파의 대표적인 인물. 해방후 조선건국준비위원회(건준)를 조직, 이를 기초로 조선인민공화국을 선포했으나 우익진영의 반대와 미군정의 인정을 받지못해 실패했다. 몽양은 좌파온건세력을 중심으로 근로인민당을 조직해 정치활동을 하다 47년 7월19일 암살당했다.<김성호기자>김성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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