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습과정 군권장악 “일등공신”/인민무력부장 기용 가장 접근 김정일에게는 군경험이 없다. 북한이 병영체제임을 감안할때 그것은 김정일의 정치생명에 치명적 약점이 될 수 있다.
그러나 김정일은 권력세습과정에서 군권을 장악하기 위해 오랫동안 치밀하게 공작을 해왔다. 70년대 중반부터 대대장급 간부직에 자기사람을 심기 시작했으며 80년10월 6차 당대회에서 당군사위원으로 뽑혀 공식적인 힘을 행사하기 시작했다. 이어 93년 김정일은 마침내 인민군 총사령관 겸 국방위원장에 추대되고 원수 칭호까지 받아 군권다지기 작업을 마무리지었다.
이 과정에서 가장 큰 공로를 세운 인물이 바로 오극열이다. 「군부의 황태자」 「김정일의 분신」으로 까지 불리는 오극열(66·대장·당작전부장)은 김정일체제의 군사부문에서 단연 주목해야 할 인물이 아닐 수 없다.
군사전문가들은 김정일체제가 공식으로 출범하면 오극열이 멀지않아 인민무력부장에 오를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김정일이 지금의 무력부장 오진우를 국방위부위원장으로 예우하면서 이미 79년에 총참모장을 맡았던 오극열을 그 자리에 앉힐 것이란 예상이다. 그럴 경우 무력부장은 오진우 때와는 다른 자리가 될 것이다. 군령·군정을 모두 총참모장이 행사하는 통합군제에서도 무력부장은 실권까지 쥐는 막강한 직책이 될 것으로 보인다.
오극열은 빨치산원로 중심의 북한군부에서 30대 공군사령관, 40대 총참모장을 기록한 초고속 출세를 해왔다. 그 배경에는 김일성부자와의 남다른 인연이 깔려 있다.
오극열은 김일성의 가장 충직한 빨치산 동료로서 32년에 전사한 오중흡의 아들이다. 중국 길림에서 태어난 그는 혁명유자녀로 뽑혀 김일성의 집에서 자라기도 했다. 만경대혁명학원 1기생으로 입교하기전 6개월 가량 오극열은 김정일과 함께 김정숙의 보살핌을 받았다.
김일성가족과의 특수관계로 출세길에 올랐던 오극열은 70년대 김정일 후계옹립 과정에서 반대파를 숙청하는 결정적 역할을 했다. 그는 김정일세습에 반기를 든 군총정치국장 이용무, 인민무력부부부장 장정환등을 반당·반혁명분자로 몰아 쫓아내는데 앞장섰다. 군의 실세가 되는 전기였다.
이와 함께 두드러지는 점은 오극열이 소련 공군대학에 유학을 하고 공군대학장, 공군사령관등을 지낸 사실이다.
김일성은 한국전쟁후 공군력의 열세를 가장 뼈아프게 반성했다고 한다. 따라서 군사전문가들은 오극열이 김일성의 배려아래 의도적으로 공군을 택해 소련에 유학하고 온뒤 남한보다 10년 가량 앞서 계속 공군력을 증강하는 사업을 주도해온 것으로 분석하고 있다. 특히 북한은 79년 이후 소련 및 동구권에 군사대표단을 보내 신군사전략과 전술교리의 연구발전, 신예무기 도입을 추진하면서 현대전을 위한 군사체제 정비를 해왔다. 전격전 개념등 소련의 전략전술을 공부한 오극열이 총참모장시절 이 작업을 맡았던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그러나 오극열은 총참모장 10년째인 88년 최광에게 자리를 물려줘 의문을 불러 일으켰다. 「군사과학과 군사기술」 「인민군대의 기술장비 개선」을 강조해온 그의 노선이 기술보다 사상, 현대무기보다 전인민의 무장화와 동원을 우선시하는 오진우등 항일혁명 1세대의 주장과 갈등을 빚었기 때문이었다.
권력무대에서 완전히 사라질 것으로 보이던 오극열은 얼마안가 당민방위부장으로 복귀했다. 그는 최근 작전부장으로 대남사업을 담당하며 여전히 김정일의 신임을 받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군사전문가들은 만약 김정일이 승계작업을 마무리짓고 오극열을 중용한다면 북한군은 대대적인 세대교체를 겪을 것이며 현대화·정규화 작업에 더욱 힘을 쏟을 것으로 보고 있다. 하지만 현대화·정규화 추진에 따른 권력분립과 군의 정치개입 제한등으로 혁명1세대가 주창해온 「당·군 혼연일체」의 질서가 무너진다면 군부내에 예기치 못한 혼란이 올 수도 있다는 것이다. 오극열의 움직임에 김정일체제의 안정여부가 달려 있다고도 할 수 있다.<손태규기자>손태규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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