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측 「원칙유효-방법재고」에 불만/빠른 시일 개최 등 대내외과시 노려 북한주석 김일성의 사망에도 불구하고 「이미 약속된 원칙에 입각해」 개최될 것 같았던 남북정상회담에 심상치 않은 먹구름이 드리워지고 있다.
북한의 중앙방송은 16일 『남조선당국자들은 북남최고위급회담(우리측 표현으로는 남북정상회담)을 저버리려 하고 있다』고 비난하고 나섰다. 남북정상회담이 합의 발표된 뒤 김일성사망 이후에까지 대남비난방송을 지극히 삼가왔던 북한이 처음으로 우리를 「공격」하고 나선 것이다.
현재까지 여러 정황으로 볼 때 김정일은 가급적 빠른 시일에 김영삼대통령과 정상회담을 갖고 싶어하는 것으로 파악되어 있다. 북한이 김일성사망 직후 우리측에 정상회담 연기를 요청할 당시 전화통지문이 아닌 서신의 형식을 취했던 것이나 취소나 유보가 아닌 연기임을 강조하는등의 자세에서 이러한 북한의 태도가 감지되었다. 또 같은날 북한의 유엔주재 차석대사는 『북미협상은 김정일체제 출범후에도 변함이 없을 것이며 김일성주석이 미국에 약속한 핵개발 동결정책은 그대로 계속될 것』이라고 밝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정부는 지금까지 『남북정상간에 합의된 회담개최의 기본정신은 살아 있다』는 원칙적인 입장만을 표명한채 회담의 전망등에 관한 구체적 언급을 자제해왔다. 남북관계 개선을 위해 두 정상이 직접 만나 현안에 대해 의견을 교환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입장에는 변함이 없지만 북한측 회담상대가 뚜렷하게 「정상」으로서의 자리를 잡아야 한다는 것이다. 북한이 김일성장례식 직후 권력구도를 일단 정비하더라도 새로운 지도체제에 대한 담보가 없는 한 정상회담개최는 어렵지 않겠느냐는 것이 정부의 입장이다.
정부 당국자는 이와관련, 『북한의 새로운 지도체제가 확고하게 정리됐는지 여부는 빨라야 10월께 열릴 것으로 보이는 노동당대회를 지켜봐야 할 것』이라고 말해 정상회담은 당대회 이후에나 가능할 것이라는 입장까지 밝히고 있는 상황이다.
정상회담의 장소에 대해서도 정부는 비슷한 이유로 『현재로서는 평양은 곤란하다』는 입장이다. 김일성과 회담할 때는 평양일 수 있지만 김정일의 경우는 다르며 설사 평양회담이 먼저 열린다면 서울의 2차회담도 당연히 보장돼야 한다거나, 서울회담이 먼저라야 한다는 등의 새로운 제의를 해야 한다는 것이 정부내의 대체적인 시각이다.
이같은 상황에서 북한이 우리정부가 정상회담에 소극적이라고 비난하며 공세의 고삐를 잡아채기 시작한 것은, 따라서 우리정부의 이같은 「께름칙하고 불확실한 인식」에 대한 견제에서 비롯된다는 것이 일차적인 관측이다. 즉 남북정상회담에 대해 「원칙유효―방법재고」를 상정하고 있는 우리정부에 대해 스스로 한 발짝 뒤로 제끼는 모습을 보임으로써 새로운 힘겨루기를 시작해 보자는 저의를 나타내고 있다는 것이다.
정부의 또다른 당국자는 이와관련, 『북한은 김영삼대통령이 남북정상회담을 성사시키지 못할 경우 여론의 질책을 받을 것으로 판단하고 있는 듯하다』면서 『북한은 우리가 결국은 여론에 밀려 그들과의 「최고위급회담」에 응해올 것이며 따라서 정상회담의 한쪽 당사자로 부각될 김정일의 대내외적 위상을 한껏 올려놓자는 의도가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이 당국자는 『김일성사후 미국등 서방국가들이 「김일성때와 같은 대북관계」를 원하고 있는 듯한 행태를 취해 온 것이 사실』이라고 지적하면서 『이같은 상황에 고무된 김정일이 대외적으로나마 서둘러 김일성의 공백을 메워 나가려는 시도로도 풀이된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북한의 이날 「공세」가 『남북정상회담이 완전히 무산돼도 무관하다』는 입장의 단면을 내비친 것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김일성의 국내외적 위상을 고스란히 접수하려는 김정일로서는 현상황에서 남북정상회담 만큼 매력적인 카드를 찾기가 어려울 것이기 때문이다. 남북정상회담의 개최는 한반도의 문제해결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북미고위급회담이나 북미관계개선, 북미수교에까지 이르는 핵심이 될 것이며 따라서 대내적 권력장악과 대외적 위상확인을 위해 가장 효율적인 수단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남북정상회담의 성사는 김일성의 「공개된 유업」이라는 성격이 강해 후계자로서의 부담까지 안고있는 측면이 있다.결국 이같은 실리계산과 우려가 우리정부에 대한 「역공세」의 모양으로 드러나고있다는 것이다.<정병진기자>정병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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