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세 보증수표… 당·정·군 “실세”/후계체제 뒷받침에 “절대적 공” 북한정권의 모태는 빨치산이었다. 빨치산투쟁업적은 김일성유일지배체제의 정서적 지주였다. 이른바 「항일 빨치산계」는 당·정·군의 핵심을 이루며 김일성정권을 떠받쳐 왔다.
김정일세습의 논리적 배경도 빨치산 혈통의 승계였다. 김정일은 「항일혁명전통」을 강조하면서 빨치산 원로들의 적극 지지를 얻어내 자신의 군사지도권을 확립해 왔다.
김일성의 죽음으로 이제 빨치산시대는 막을 내렸다고 할 수 있다. 인민무력부장오진우, 총참모장최광, 호위총국장이을설등 군부의 요직에 남은 세력이 있으나 사실상 대세는 그들 손을 떠났다.
그러나 빨치산의 후광은 대를 이어 가고 있다. 김정일체제의 인맥에는 빨치산의 아들들이 상당수 포진해 있다. 김정일이 빨치산 업적을 중심으로 김일성신격화에 앞장섰던 만큼 북한에서 「빨치산의 아들」이란 간판은 출세의 보증수표였다. 김일성은 동지의 의리로 아들들을 배려해 대이은 충성을 받아냈다는 것이 북한전문가들의 분석이다. 김일성을 맹종했던 아버지에 이어 빨치산의 아들들은 80년대 김정일 후계체제 확립에 절대적인 공을 세웠다. 김정일체제는 부자세습에다 충성세습의 체제다.
김일성이 죽자 북한의 핵심인물중 가장 먼저 김정일에 충성을 맹세한 인물중한명이 사노청위원장인 최룡해였다. 그의 아버지는 김일성의 빨치산동지로 인민무력부장까지 올랐던 최현. 김일성대학을 나온 최룡해는 아버지의 후광으로 권력의 길에 들어섰으며 노동당 핵심전위조직인 사노청의 책임자로 김정일체제 다지기에 앞장서 왔다.
권력서열 25위로 당비서인 김국태는 김책의 장남이다. 내각부수상과 전선사령관을 지냈던 김책은 그의 이름을 딴 김책공대가 생길 정도로 김일성이 아끼던 인물. 만경대혁명학원 1기생인 김국태는 김일성유일사상체계를 확립한 장본인으로 신문등 언론매체를 통해 김정일부각을 주도해 온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김정일이 25세의 젊은 나이로 문화예술지도과장이 되어 당 사상사업의 실권을 쥐었을때 선전선동부장이었다.
개성시당 책임비서인 임수만은 김일성의 빨치산 직계부하로 부주석까지 올랐던 임춘추의 아들이다. 그는 학창시절 김정일의 친구였던 인연에다 아버지의 음덕으로 일찍 출세길에 올랐다. 그는 김정일시대를 끌고나갈 인물로 꼽힌다.
빨치산활동에서 살아남아 북한권부의 핵심이 되었던 인물들 외에 무명빨치산의 아들들도 상당수 요직에 있다.
권력서열 45위로 당부장인 오극열은 가장 주목되는 2세. 김일성 밑에서 빨치산활동을 하다 죽었다는 오중흡의 아들이다. 그는 만경대혁명학원 1기생으로 입교하기전 6개월 가량을 김일성 집에서 김정일과 생활한 적이 있다. 김정숙이 오극열, 전병호(서열11위·당비서), 한성룡(서열12위·당비서)등 3명을 혁명유자녀로 길렀다는 것이다. 오극열은 김정일의 오른팔로 총참모장까지 올랐으나 한때 쫓겨났다가 복귀했다. 앞으로 인민무력부장이 되어 김일성시대의 오진우 같은 역할을 할 것으로 보인다.
한성룡은 빨치산이던 아버지가 38년 무산지구 전투에서 사망했다. 김일성대학과 체코 프라하공대를 나온 그는 전형적 기술관료로 김정일의 심복으로 꼽힌다. 그는 당정치국위원, 중앙인민위원회위원을 지내며 당과 국가경제정책을 잇는 통로역할을 해왔다.
서열 13위 서윤석(당 정치국원·평남당 책임비서)과 15위 최태복(당 정치국후보위원·당비서)도 빨치산의 아들들. 아버지가 김일성을 따라 다니다 일본군경에 숨졌다는 서윤석은 당 조직지도부 부부장 시절 대학을 갓 나온 김정일이 조직지도부에서 커 나갈때 협조를 했다. 최태복은 정무원 고등교육부장으로 있을 때 대학생 청년 사이에 김정일을 부각시키는 작업을 했다.
30위로 부총리 겸 화학공업부장인 김환은 아버지 김혁이 김일성 대신 일본군에 붙잡혀 총살당했다고 한다. 이밖에 16위 최영임(부총리 겸 금속공업부장)과 44위 이창선(당부장), 백범수(황해남도 당책임비서)등도 빨치산의 아들들이다.<손태규기자>손태규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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