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총련 등 주도 학생운동 「실세」/“지금이 어느땐데 아직도” 비난 전남대학생회관에 김일성분향소가 설치됐던 사건을 계기로 학생운동단체, 특히 주사파학생들이 따가운 시선을 끌고 있다. 「도대체 어떤 학생들이 아직도 그런 미몽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있느냐」고 개탄하는 소리도 높다.
학생운동의 본산인 한국대학총학생회연합(한총연)을 주도하는 세력은 김일성주의(주체사상)를 핵심사상으로 한 주사파이다.
주사파는 86년 전방입소 거부투쟁, 부산미문화원 점거사건등을 계기로 대학가에 뿌리를 내린데 이어 87년 6월항쟁을 기점으로 당시 대학 주도세력인 마르크스―레닌주의(ML주의)파를 누르고 중심세력으로 급부상하며 학생운동의 실세자리를 굳혔다.
이들은 당시 국내상황을 「식민지 반봉건(반자본주의)사회」로 인식, 이에 따른 변혁의 성격을 민족해방운동이라고 파악했다. 이들의 지상과제는 「미제축출」을 통해 한반도에 「자주―민주―통일」국가를 실현하자는 것이다.
주사파는 89년 7월 임수경양의 평양축전 파견을 기점으로 이를 주도한 주사파 중심의 NL(민족해방)계열과 반대세력인 PD(민중민주)계열로 학생운동권이 양분되면서 1차위기를 맞았다.
이와 함께 대검이 89년11월 임종석전대협의장등 주사파 핵심인물들에 대한 구속수사에 들어가고 1백20여명의 주사파 관련자들을 구속함으로써 학생운동권내의 주사파세력은 크게 위축됐다.
이후 4년여동안 NL계열을 주축으로 학생운동을 이끌어온 주사파는 전대협이 지난해 3월 총회를 마지막으로 6년간의 활동을 마감함으로써 급격하게 퇴조기미를 보였다.
그러나 주사파는 전대협에 이어 또다시 NL계열을 중심으로 한 한총련을 93년 5월 고여대에서 출범시킴으로써 학생운동의 중심세력임을 과시했다.
한총련은 출범당시 학생운동영역의 다변화, 평화적 행동방식 채택을 기치로 투쟁일변도의 운동방향에서 탈피, 조직을 「생활·학문·투쟁의 공동체」로 변화시키는데 주력했다.
그러나 「투쟁」영역에서는 전신인 전대협을 이어받아 주한미군 철수 평화협정 체결 국가보안법 철폐 양심수 석방등을 그대로 수용했다.
주사파의 NL계열은 93년 11월 94년도 학생회장선출을 계기로 다시 한번 위축됐다. 당시 1백27개 대학중 NL계열은 61개교에서 당선자를 내는데 그쳤고 PD계열이 20개교, 「21세기 연대」등 신운동권 및 비운동권이 35개교에서 승리를 거뒀다.
주사파는 지난 5월말 조선대에서 NL계열을 중심으로 한 제2기 한총련을 출범시켜 현재의 지휘체제를 구성했다. 제2기 한총련도 「민족자주의 애국주의」란 이념아래 「자주 민주 통일운동」을 좌표로 설정, 주사파의 이념을 그대로 잇고 있다.<박희정기자>박희정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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