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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 하기와라료 특별기고/김부자가 쌓은 「허위의 바벨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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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 하기와라료 특별기고/김부자가 쌓은 「허위의 바벨탑」

입력
1994.07.1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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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 부수지 않으면 심각한 결과 올것 내가 김정일을 가까이서 본 것은 1980년 10월의 조선노동당 6차대회때였다. 당시 나는 일본공산당의 기관지 「아카하다」(적기)의 기자신분으로, 일본공산당 대표단의 일원으로 이 대회에 참가했다. 이 대회는 그동안 은밀히 진행해온 김정일후계작업을 처음으로 외부에 공개한 회의였다.

 정면단상에 김일성이 간부들과 함께 앉아 있었지만 김정일은 오른쪽 끝에 조금 떨어진 곳에 자리잡고 있었다. 대회보고와 토론이 행해지고 있었지만 김정일은 이런 것과는 전혀 관계가 없다는듯 서류만 들여다보고 있었다. 속속 서류가 도착하면 김정일은 그것을 한번 본뒤 사인을 하고 쌓아두면 옆의 부관이 그것을 받아서 가지고 나갔다.

 김정일이 국정의 중요사항을 빈틈없이 챙기고 있음을 과시하는 연출이었다. 외국인기자석은 김정일이 제일 잘보이는 데 있었기때문에 나도 그의 5정도 앞에서 사진촬영을 할 수 있었다.

 김정일은 1964년 중앙당에 들어와서 그자리에 오르기까지 16년이 걸렸다. 이 16년간 김정일은 두가지의 중대한 실수를 저질렀다고 나는 생각한다. 1967년과 72년의 일이다. 67년의 실수는 그해 5월에 열린 조선노동당중앙위원회 제4기제15회전원회의에서였다. 이것은 김일성의 유일사상체계를 확립하기 위한 회의였다. 이때 김일성의 생각외에는 허용되지 않는 「유일사상체계」확립에 전적인 찬성을 하지 않는 중앙간부중 60∼80%가 추방됐다. 이 내용은 나의 졸저 「서울과 평양」(1989년간, 한국어역서는 다나출판간) 에 「김일성의 쿠데타」라는 항목에서 자세히 썼다.

 이 쿠데타의 선두에 서서 고참간부의 「죄상」을 밝혀 속속 추방했던 자가 김정일이다. 이때부터 김정일은 후계자의 지위를 확실히 했다고 말할 수 있다. 이때 합리적인 생각을 갖고 있던 간부는 모두 추방당했기 때문에 이후에는 김부자의 생각대로 모든 것을 추진할 수 있었다. 소위 극좌 모험주의로 달려갔던 것이다. 1968년 청와대 습격, 울진삼척 무장공비 남파사건등 남한 무력해방을 기도해 전쟁직전까지 갔던 것이다.

 이것이 참담한 실패로 끝나자 김정일은 71년부터 대남 유화책인 소위 협상전술로 바꾸었고 이때 적십자회담과 남북공동성명이 나왔다. 그러나 73년에는 이 정책을 포기하고 다시 쇄국정책으로 돌아섰다. 이 정책전환의 최대요인은 남북교류에 의해 알게 된 남한의 경제발전상 때문이었다.

 이제까지의 「남조선인민은 미제의 식민지하에 헐벗고 굶주려 거리를 방황하면서 쓰레기통을 뒤지고 있다」라는 선전은 완전히 거짓이었다. 서울은 북한 주민이 본적도 없는 상품이 넘쳐흐르고 자동차의 홍수, 늘어선 빌딩사이로 시민들이 활기있게 돌아다녔다. 이 사실을 알고 더욱 충격을 받은 것은 김정일이었다. 그는 교류를 계속하다가는 북한체제의 존립마저 위험하다고 판단해서 다시 쇄국으로 돌아선 것이다. 그래서 북한의 경제 진흥을 위해 외국으로부터 플랜트차관를 도입했다가 결국 외채상환도 못하고 이를 갚기 위해 외교관의 밀수나 위조달러제조등 파렴치한 행위를 저질러 전세계에 빈축만 샀다.

 이때 김정일은 쇄국정책을 택하지말고 남한 실정에 대한 거짓선전을 중지하고 남한의 실정을 그대로 북한의 인민들에게 전해주었어야 했다. 이를 위해서는 정보의 공개, 경제교류, 인사교류, 화해분위기등으로 나아가야 했다. 이 중요한 기회를 놓치고 거꾸로 허위와 쇄국과 대남 대결정책을 추진해 이후 20년의 정체를 맞게 됐다.

 내가 평양특파원으로 있을 당시가 바로 1972년부터 1973년까지였다. 표면적으로는 남북화해무드였지만 실제로는 엄격한 통제로 사회전반을 장악하고 있을 때였다. 당시 나는 사회주의와 북한에 홀려있어서 북한을 「제2의 조국」정도로 생각하고 있었다. 오사카(대판)외국어대 조선어과를 졸업해 한국말도 할 수 있었다. 그런데 북한당국은 이 점을 우려했다. 그들은 허위선전으로 아름답게 분식해왔던 북한의 실상이 노출되는 데 두려움을 갖고 있었다. 그들은 나를 「일본공산당에서 파견한 스파이」로 간주해 엄격하게 감시했다. 결국은 내처가 집을 비운사이 침실까지 특수부대가 들어와 여기저기서 「증거」를 잡아 1973년 4월 나를 추방했다. 이후 일본 공산당은 평양에 특파원을 파견치 않았다. 일본공산당이 88년의 KAL기 폭파사건을 북한의 범행으로 격렬하게 비판한뒤 일본 공산당과 조선 노동당의 관계는 단절됐다.

 김일성의 급사를 접하고 나는 여러가지 감회에 젖었다. 내가 참석했던 호화의 극치였던 주석궁의 대파티와 인민의 가난에 찌든 모습이 함께 떠올랐다. 김일성은 김정일의 도움을 받아 거대한 바벨탑을 쌓았다. 허위와 거짓투성이의 탑, 즉 「우리식 바벨탑」이다. 이탑의 중압으로 김일성은 압사했다. 아버지의 유산을 물려받은 김정일도 이 탑을 부수지 않는 한 똑같은 운명을 면하기어렵다. 그러나 이것을 파괴하는데도 막대한 에너지와 시간이 필요하다. 잘 파괴하지 않으면 주변에 미치는 영향은 심각하다. 그래서 지금부터 시작해야 할 작업을 세계는 침을 삼킨채 지켜보고 있다. 김일성이 위대했기 때문이 아니다. 독재자의 우행이 어느정도 「위대」할 수 있는가에 질려버렸기 때문이다.<정리=남영진기자>

□약력

 ▲전아카하다지(적기·일본 공산당 기관지)

▲평양특파원 북한문제전문가

▲「조선전쟁」(문예춘추사간),「서울과 평양」등 저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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