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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문학인대회」에 부쳐/김윤식 문학평론가 서울대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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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문학인대회」에 부쳐/김윤식 문학평론가 서울대교수

입력
1994.07.1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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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덤불을 생각하며/잠시라도 함께모여 몸을 맞댈수 있다면… 한국일보 창간 40주년 기념사업의 하나로 기획된 「한국문학인대회」가 24일부터 26일까지 경주·포항에서 열린다. 그 규모의 장대함에서, 그리고 그 시의의 적절성에서도 돋보이지만 무엇보다도 그것의 필요성에서 평가될 성질의 것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일찍이 우리 선배 문인들도 이러한 전국 규모의 문인대회를 구상하고 또 실천하고자 노력한 바 없지 않았다. 국권상실기의 암흑 속에서도 빛나는 문학정신을 은밀히 품어온 우리 문인들은 광복을 맞이한 그 이듬해인 46년 2월 8일과 9일 양일에 걸쳐 「제1회 조선문학자대회」를 서울 YMCA에서 연 바 있었다.

 신문학운동 개시 이래의 전과정에 대한 하나의 결산인 동시에 광복 이후의 문학적 실천에 대한 결산이 그 목적이었던 만큼 이 대회는 참으로 감격스런 장면이 아닐 수 없었다. 시골서 올라온 시인 신석정이 이렇게 읊었던 바조차 있었다.

 <태양을 의논하는 거룩한 이야기는 항상 태양을 등진 곳에서만 비롯하였다. 달빛이 흡사 비오듯 쏟아지는 밤에도 우리는 헐어진 성터를 헤매이면서 …(생략)…그러는 동안에 멀리 떠나버린 벗도 있다. 그러는 동안에 몸을 팔아버린 벗도 있다. 그러는 동안에 맘을 팔아버린 벗도 있다. 그러는 동안에 드디어 서른 여섯해가 지나갔다. 다시 우러러 보는 이 하늘에 겨울밤 달이 아직도 차거니 오는 봄엔 분수처럼 쏟아지는 태양을 안고 그 어느 언덕 꽃덤불에 아늑히 안겨보리라.> (「꽃덤불」)

 이러한 시적 감격이 어찌 한 시인만의 것이었겠는가. 그러나 제1회라 했고, 전국문학자대회라 했음에도 불구하고 이 대회에 참가한 문인은 91명에 지나지 않았으며, 그 결과는 문학가동맹이라는 단체 하나를 낳는 결과에 그치고 말았다.

 한편 이에 맞선 또하나의 문인대회가 열렸는데 서울의 YMCA에서 46년 3월13일에 열린 「전조선문필가대회」가 그것이다. 전자에 여운형이, 후자에 김구가 참석함으로써 그 정치적 성격이 뚜렷하였다. 이 정치성의 개입이 혹시 문인대회의 전국적 규모를 무산시켰거나 제한케 한 동인의 하나가 아니었겠는가. 정치성이 개입되는 순간 예술은 일단 민족성과 세계성을 부분적으로 상실하거나 상처입기 쉽다는 교훈을 우리는 여기서도 얻을 수 있다.

 광복 이래 우리 문인들은 아직 한번도 전국적인 문학자대회를 가져보지 못한 형편에 있었다고 범박하게 말할 수 있겠다. 이는 우리 문학사의 한 가지 불행이 아니면 안 되리라. 이러한 역사적 사실에 대한 반성적 계기를 머금고 출발하기에, 이번 「한국문학인대회」가 비로소 이름 그대로 처음 있는 대회가 될 것으로 보인다.

 돌이켜 보건대 분단고착 이래 우리 문학은 역사와 더불어 많은 곡절을 겪고 격랑을 넘어 오늘에 이르렀다. 90년대 들어 우리 문학은 양적인 풍요로움과 질적 우수성 및 이념에 대한 유연성을 커다란 저력으로 안고 있다.

 광복 50년을 한 해 앞둔 이 시점에서 볼 때 우리 문학은 안으로는 장년의 단계라 할 것이며, 바야흐로 그 넘쳐 흐르는 힘의 세계를 향해 뻗어갈 자세를 취하고 있다. 21세기를 눈앞에 바라보는 이 시점에서 우리들 문인 스스로의 자세를 가다듬고, 잠시라도 함께 모여 몸을 맞댈 수 있다면 이번 모임의 의의는 자못 크다.

 만일 우리 문인의 소속단체를 한국문인협회, 민족문학작가회의, 국제펜클럽 한국본부 등등으로 대표시킬 수 있다면 이들이 함께 모여 얼굴을 맞대는 일 자체가 우리 문인들의 새로운 대표성의 성취라 할 수 없겠는가.

 88년 이래 논의되기 시작한 「남북작가회의」가 지금껏 난항을 거듭해 온 원인의 하나가 이 대표성의 문제에 있었음을 염두에 둔다면, 멀지 않아 남북 문인들이 함께 만나야 될 장면에서 우리측의 대표성은 이번 대회같은 곳에서 자연스럽게 도출될 성질의 것이리라.

 문인이란 무엇인가. 모르는 사이에 역사와 삶에 대해 고도의 훈련을 쌓은 무리를 가리킴이 아니겠는가. 그 때문에 문인 5백명이라는 숫자는 실로 무의미한 것, 1백명이거나 1천명이라도 상관없는 일이 아닐까. 그야 어쨌든, 조금의 마음의 틈을 내어 남방 차림 그대로 한번쯤 분수처럼 쏟아지는 태양을 안고 그 어느 언덕 꽃덤불에 아늑히 안겨보면 안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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