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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사회실상과 김정일체제/서재진 민족통일원 북한연구실장(특별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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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사회실상과 김정일체제/서재진 민족통일원 북한연구실장(특별기고)

입력
1994.07.1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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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배인 동무, 저 집들을 보십시오. 훌륭하지요. 저 울타리 높은 집은 여기 노동자들이 18톤급 이라고 합니다. 그게 무슨 뜻인지 압니까? 18톤의 세멘트가 들어간 집이라는 겁니다. 간부들이 경쟁적으로 개인저택을 지었지요. 울타리를 높이고 정원엔 감나무를 심고 포도넝쿨을 올리고 공장창고에서 동관을 빼서 아랫방 구멍탄 아궁에 소형 보이라를 설치해서 칸칸이 온수가 돌지요. 세멘트가 많은 공장이 돼서 그러는가요? 그래도 지배인동무는 그들을 두둔하렵니까? 이제는 시내에서 이 언덕을 가리켜 「간부촌」이라고 합니다…』 북한의 장편소설 「환희」(김봉철, 문예출판사, 1992)에 나오는 한 구절이다. 부정적인 측면은 노출시키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하는 북한소설에서 북한 간부들의 개인주의와 부패상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다. 시멘트 공장의 한 간부가 시멘트와 동관 등 공장 자재를 몰래 빼내어 금지된 개인주택을 버젓이 지어 살고 있다는 것이다. 한 사람만이 아니라 간부들이 경쟁적으로 그렇게 한다는 것을 시사한다.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도 맑은 법이다. 같은 소설에 노동자들의 절취행위에 관한 묘사도 나온다.

 『말이 났으니 지금 그 바께쓰가 일부 일꾼들에 의해서 농촌으로 빠져나가서는 술이 돼서 누구 입에 들어가는지 동문 알고 있겠지? 해변가에 나가서는 물고기가 돼서 누구네 집 처마에 주런이 걸린다는 걸 동문 모르오?』

 시멘트 공장에서 시멘트를 나르는데 사용되는 도구인 바께쓰를 일꾼들이 절취하여 술로 바꾸어 마시기도 하고, 생선과 바꾸어 처마에 걸어놓고 말려서 먹기도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집단주의, 주체사상, 사회주의를 표방하면서 인간개조사업을 지속해온 북한 사회에는 이런 국가재산의 절취행위만 성행하는 것이 아니다. 뇌물, 암시장등 일탈적인 개인주의와 물질주의가 확산되고 있다. 시베리아 벌목장의 나쁜 작업조건에도 불구하고 시베리아에라도 가서 돈을 벌겠다는 사람들이 증가해 북한사회는 돈벌이를 위한 열풍도 불고 있다. 북한에 있을때 소원이 장사를 실컷 해 보는 것이었다는 한 귀순자의 말이 실감난다.

 김정일체제가 시작되는 최근 북한의 사회주의는 저물어가는 석양에 검은 그림자가 길게 드리우고 서있는 고목이라고나 할까. 사회주의에서 혜택을 받은 간부들이 사회주의의 시멘트와 동관을 빼내어 개인주의를 확산시키고 있다. 앞에서는 인민들에게 집단주의와 주체사상과 우리식 사회주의를 강요하면서도 뒤돌아서면 뇌물 긁어모으고 국가재산을 빼돌려서 목 날아가기 전에 한밑천 잡기에 바쁘다.

 소련과 같은 사회주의 종주국도 망했는데 북한이 어떻게 버티느냐며 「우리식 사회주의」에 대해 자조하기 일쑤다. 공장에서 생산한 물건은 국가의 공식 분배통로를 통하여 인민들에게 공급되어야 하는데 간부들이 절반은 뚝 잘라 암시장으로 유출시키기 때문에 월급이라고는 용돈밖에 안받는 인민들은 일과후에 장사를 하거나 일과중에 상사에게 뇌물주고 휴가얻어 장사를 하면서 돈을 벌어야만 비싼 돈으로 암시장에서 생필품을 살 수 있다.

 공장 가동률이 30∼40%밖에 안되는 최근의 경제상황은 생필품 생산율도 그 정도 밖에 안됨을 의미하는데 그 나마도 절반 이상은 정상적인 배급계통에서 이탈하여 자본주의적 상품시장으로 유출되기 때문에 북한 주민들은 생필품의 상당부분을 암시장에서 구입해야 하는 사회에서 살고 있다. 북한 주민들의 식량과 생필품이 부족하다는 것은 단순히 경제 상황의 문제이다. 그러나 식량과 생필품을 조달하는 방식이 이렇게 변화한 것은 이미 체제변화의 문제이다.

 소련이나 동구 사회주의 국가들이 붕괴될 당시의 사회상과는 그 정도면에서는 차이가 있지만 붕괴한 사회주의 국가들의 사회적 징후가 북한에도 나타나고 있다. 북한 지도부에서는 자본주의적 제도를 도입하는 체제개혁을 기피하고 있지만, 실제로 북한 주민들의 일상생활에서는 이미 체제개혁이 전개되고 있다.

 김정일 체제의 앞날을 전망하기 위하여 김정일만 분석해서는 곤란하다. 김정일이 딛고 서있는 북한 사회의 모습을 볼때 김정일 체제가 나아가야 할 방향은 명백하다. 북한에서 중국이나 베트남처럼 개혁과 개방정책이 적극 추진된다면 북한주민들의 개인주의와 물질주의가 충분히 국가적 자원으로 활용되어 경제회복은 생각보다 빨리 이루어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김정일이 과거처럼 자유화 바람의 침습이 두려워 폐쇄주의를 지속한다면 형식적 사회주의와 주민의 실생활이 괴리될 뿐만 아니라 비효율과 모순이 축적되어 체제유지에 어려움을 겪게 될 것이다.

 김일성체제가 시작될때는 일본 제국주의 체제하에서 통치당했던 쓰라린 경험때문에 사회주의적 사회 건설을 인민들에게 하나의 가능한 희망으로 설득할 수도 있었다. 사회주의가 비틀거리는 현시점에서 김정일 체제는 북한의 인민대중에게 어떠한 희망을 주어야 할 것인지를 분명히 인식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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