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닌·모택동사망이후 친위세력 대대적 숙청/스탈린 의문사… 차우셰스쿠 부부 함께 처형 강권통치로 절대권력을 누려온 독재자들의 죽음은 그들의 카리스마만큼이나 베일에 싸여 있으며 이후 치열한 권력투쟁을 낳아 왔다.
특히 1인 독재로 일관한 절대권력자들의 죽음은 의문이 풀리지 않은 채 역사에 묻혀 있거나 그들의 카리스마는 권력쟁탈에서 승리한 후계자들에 의해 격하되어 왔다.
8일 사망한 김일성북한주석도 자연사했을 가능성이 많은 것으로 알려졌으나 의문이 명백히 풀리지는 않고 있으며 그의 후계자로 알려진 김정일의 권력장악여부도 지금 단계에서는 일단 미지수이다.
1917년 10월 볼셰비키혁명을 통해 집권한 레닌은 세계 최초의 사회주의 국가를 건설, 토지국유화등 강력한 사회주의 정책을 추진하는 한편 밖으로는 제3인터내셔널을 결성, 세계 공산혁명을 주도했다.
그러나 그는 말년에 신경쇠약과 기억력상실·불면증등에 시달리다 24년 5월 김주석과 마찬가지로 심근경색으로 사망했으며 이후 그의 친위세력들은 스탈린에게 숙청당하는 비운을 당했다.
레닌말년에 이미 당권을 장악한 스탈린은 당개혁을 호소하는 트로츠키와 권력투쟁을 전개하는등 34년까지 반대파 제거를 위한 대대적인 숙청을 벌인 끝에 권력기반을 공고히 했다. 스탈린은 집권이후 농업의 집단화등 강압적 경제정책을 실시했고 이른바「대공포의 시대」에 지식인과 노동자·농민등 2천만명을 희생시키는 강권통치를 자행했다.
그는 또 『당의 철의 규율은 의지의 통일과 모든 당원의 절대적인 행동통일』이라는 미명아래 중앙집권적인 통제를 강화, 레닌 친위세력들을 차례로 제거해 구볼셰비키세력을 완전히 몰락시켰다.
철권통치자 스탈린도 한국전쟁 막바지인 53년 3월 5일 의문에 싸인채 사망했으며 그후 말렌코프와 베리야, 흐루시초프등 삼두 지배체제 과정에서 사실상 권력의 핵으로 부상한 흐루시초프에 의해 호된 비판을 받았다.
소련정부는 스탈린이 죽은지 3일 반이나 지난 뒤 뇌일혈로 사망한 것으로 발표했으나 뇌일혈을 일으킨 뒤 방치된 상태에서 죽었다는 설과 독살됐다는 설이 끊임없이 제기되고 있다.
소련작가 에렌부르크는 56년 스탈린이 흐루시초프의 사주를 받은 유태인의사들로 부터 독살을 당했다고 주장,파란을 일으킨 바 있다.
또 스탈린의 딸 스베틀라나는 66년, 스탈린이 사망하기 직적 부친의 임종에 불려갔으나 환자 병상에는 낯모르는 의사들이 진을 치고 있었으며 이들이 부친을 독살했다고 주장했다.
한편 흐루시초프는 스탈린사후 처음 열린 56년 2월 제20차 공산당대회에서 비밀보고를 통해 스탈린 개인의 권위주의와 숭배,잔인성과 비인도성에 대해 집중적인 비판을 가하며 레닌주의의 원칙회복을 주장했다.
일본군과 중국 국민당군대를 상대로 공산혁명투쟁을 전개,49년 10월 중화인민공화국 초대 국가주석에 오른 모택동은 76년 9월 9일 김일성과 같은 나이인 82세로 사망했다.
공산권에서 후계자가 관례처럼 집행해온 장례위원장을 맡으며 권력을 승계한 화국봉은 모의 사망을 비교적 빠른 16시간만에 공식발표하며 모의 핵심 측근들을 제거해 나갔다.
특히 화국봉이 중심이 된 승계세력들은 강청, 장춘교, 요문원, 왕홍문등 소위 4인방을 쿠데타음모 혐의로 체포,문화혁명의 막을 내리면서 10월 당주석에 오르는등 권력을 장악했다.
중국정부는 이후 80년 전국방장관 임표일당이 B29라는 암호명으로 71년 9월 모택동을 암살하려 했다는 보고서를 내는등 모의 사망 전후에 권력쟁탈전이 치열했음을 시사했다.
철저한 우상화작업을 통해 장기집권을 유지했던 루마니아의 차우셰스쿠는 부부가 함께 처형당했으며 후계자로 지목됐던 차남 니쿠도 시위대에 대한 발포 책임으로 20년형을 선고받고 수감중이다.
65년부터 집권한 차우셰스쿠는 74년 개헌을 통해 대통령에 취임한 뒤 89년 12월 18일 발생한 반정부 시위를 무력으로 진압하는 과정에서 1천여명을 죽이는 만행으로 국민들의 분노를 촉발했다.<이종수기자>이종수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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