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만식 등 민족주의자 첫 대상/「반김정일」척결 최근까지 계속 해방 이후 북한의 정치는 김일성 김정일부자의 세습체제를 굳히는 과정이었다. 김일성은 반세기에 걸친 통치기간에 사용가능한 모든 수단을 동원, 자신과 아들 김정일을 절대권력의 상징으로 포장했다. 김일성은 특히 자신의 정치노선이나 정책에 반기를 드는 정적에 대해서는 예외없이 철퇴를 내렸다. 북한정권수립 이후 공산당 내부의 권력투쟁이 다양한 양상으로 전개됐지만 결과는 항상 김일성의 승리로 결판났다. 김일성의 절대권력에 도전하는 행위는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것이었다.
독재권력의 속성상 정치적 반대세력의 존재는 권력유지에 가장 위협적인 요소다. 특히 집권 초기 국내지지기반이 취약했던 김일성으로서는 다소 무리한 방법을 사용해서라도 모든 국가권력을 조속히 장악할 필요가 있었다. 또 최고권력자가 된 이후에는 부자세습기반을 공고히 하기 위해 독재권력을 최대한 이용했다. 그래서 김일성은 정치적 곤경에 빠지거나 정적이 정치공세에 나설 때마다 무자비한 「피의 숙청」을 단행, 일인독재체제를 구축해나갔다.
김일성이 소련군정당국의 비호하에 북한권력의 전면에 처음 나서게 된 것은 45년 12월에 있은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 제3차 확대집행위원회에서였다. 김일성은 이때부터 무려 49년동안 최고권력자로 군림했다. 이같은 장기집권은 소련 중국등 다른 공산주의국가에서도 전례가 없는 것이었지만 아무런 장애없이 자연스럽게 주어진 것은 아니었다. 김일성이 독재체제의 유지·강화에 성공한 이면에는 숙청과 인권탄압을 수반하는 독재가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북한권력내부의 암투 및 독재권력유지와 직결된 강권통치는 몇 단계로 나누어 진행됐다. 김일성은 스탈린등 다른 공산독재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매우 정교한 방법으로 정적을 제거해나갔다. 소련과 중국공산당을 등에 업은 다양한 견제세력을 김일성 혼자 한번에 제거하는 것은 위험부담이 따랐다. 때문에 김일성은 집권초부터 여러 단계로 나누어 정적숙청작업을 진행시켰다.
정적을 「반당종파분자」 「우익편향」 「좌파기회주의」등으로 몰아세워 진행된 숙청작업은 숙청대상과 원인을 기준으로 할 때 크게 5단계로 나누어진다. 1차 숙청작업은 45년부터 6·25남침 이전까지 진행됐다. 민족지도자와 국내파 공산주의자의 제거를 겨냥한 1차 숙청은 소련군정의 입김이 많이 작용했다. 김일성은 신탁통치를 반대하고 소련군정을 비난했다는 이유로 조만식등 북한내 민족주의자를 먼저 제거했다. 또 국내파 공산주의자인 현준혁 주령하 오기섭도 「공산주의의 탈은 쓴 민족주의자」라는 죄명으로 숙청됐다.
2차 숙청은 6·25남침 직후인 53년부터 55년까지 3년간 진행됐다. 이 기간에는 박헌영등 남노당세력이 집중공격을 받아 존립기반을 상실했다. 김일성은 6·25남침의 실패로 인해 당내에 「반김일성」 분위기가 일자 그 돌파구를 남노당숙청에서 찾기로 하고 모든 책임을 남노당에 돌렸다. 사실 남노당숙청음모는 이미 6·25가 끝나기 전부터 진행됐다. 김일성은 52년 12월 당중앙위 제5차 전원회의에서 남노당을 「종파주의적 잔재」 「자유주의적 경향」등으로 규정했다. 53년 8월3일 북한최고재판소는 1차로 남노당계인 이승엽 배철 임화 이강국등 10명에 대해 사형을 선고했다. 죄목은 「간첩행위」와 「무장폭력음모행위」였다. 박헌영은 이승엽등이 처형된지 2년4개월만인 55년 12월 비밀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아 총살당했다. 남노당숙청은 30년대 스탈린이 부하린, 지노비예프등 정적들을 독일간첩으로 몰아 처형한 것과 너무나 흡사했다.
집권초기 국내민족주의자와 남노당세력을 비교적 손쉽게 제거한 김일성은 54년부터 58년까지 소련파와 연안파의 거세에 나섰다. 5년간에 걸쳐 진행된 3차 숙청은 종전과 달리 많은 시간이 소요됐다. 소련파와 연안파의 정치적 비중이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김두봉 최창익 무정 김창만 이상조등으로 대표되는 연안파는 중국공산당을 배경으로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또 허가이 박창옥 남일 김열등 소련파는 고등교육을 받은 소련공산당의 정식당원이어서 당에서 축출하기가 쉽지 않았다.
연안파의 대표적 인물인 무정을 50년 12월 패전의 책임을 물어 거세한 김일성은 그 다음으로 소련파의 공격에 나섰다. 김일성은 자신의 심복인 김일로 하여금 허가이의 관료주의적 오류를 비판토록 해 소련파를 당조직에서 배제시켰다. 허가이는 당에서 추방된 뒤 권총으로 자살했다. 연안파 잔존세력에 대한 공격은 56년 2월 소련공산당 제20차 당대회에서 제기된 스탈린격하운동이 자극제가 됐다. 무정의 거세에도 불구하고 정치적 영향력을 계속 유지하고 있던 연안파는 박창옥등 잔존 소련파와 합세, 56년 8월 노동당 전원회의에서 김일성의 독주를 비난하고 나섰다. 이른바 「8월 종파사건」이었다. 김일성은 이때부터 2년여에 걸친 대규모 숙청작업에 나서 58년 3월 노동당 제1차 대표자회의에서 연안파와 소련파세력을 제거했다.
정치적 반대세력이었던 남노당세력, 소련파, 연안파를 순차적으로 제거한 김일성은 60년대 후반기부터 유일사상체계확립과 부자세습을 확고히 하는 작업에 본격적으로 착수했다. 당시 김일성 직계가 아닌 정치세력은 실질적으로 전무했다. 그러나 국방력강화문제를 놓고 군사파와 갑산파가 대립하고 있어 4차 숙청이 불가피했다. 군사파는 중국의 「인민전쟁론」을 고집했고 갑산파는 「과학전쟁론」을 주장했다. 김일성은 자신의 대남군사노선에 의문을 제기한 박금철등 갑산파를 숙청했다. 반김정일세력제거에 주안점을 둔 5차 숙청은 77년 10월 북한군 총정치국장이던 이용무상장을 시발로 최근까지 계속됐다.<장현규기자>장현규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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