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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노키오의 코(1000자 춘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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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노키오의 코(1000자 춘추)

입력
1994.07.1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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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느날부터인가 네살배기 우리 아이가 거짓말을 하기 시작했는데 꾸중을 할까 망설이다가 거짓말할 때마다 코가 조금씩 길어지는 피노키오 이야기를 해주었다. 처음에는 효과가 있는 것 같기도 하고 말을 하려다가도 『엄마, 코 길어지려고 해?』라고 물으며 제 코를 만져보는 모습이 귀엽기도 하여 내심 그 상황을 즐기고 있었다. 그런데 겁이 많은 그 아이는 바른 말을 하면서도 엄마가 믿어주지 않아 억울하게 코가 길어질지도 모른다는 걱정을 하는 듯했다. 아이의 해맑은 얼굴에 드리워진 불안감을 보면서 아주 오래전의 씁쓸한 기억 하나를 떠올렸다.

 중학교때 몽둥이 하나로 학생들 위에 군림하던 무서운 선생님이 계셨다. 어느날 영어 특활시간이 끝난 뒤 내게 방과후에 남으라고 하셨다. 나혼자 덩그마니 남은 큰 교실에서 선생님은 영어 시간에 반항적인 눈빛을 보낸 이유를 대고 사과하라는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요구를 하셨다. 그날 수업이 약간 따분하다고 느끼긴 했지만 유난히 수줍음을 타던 내가 감히 그 선생님께 불손한 태도를 보이다니….

 그날따라 지루해 하는 나의 표정이 선생님의 권위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여진 것일까? 결코 그런 적이 없었노라고 말씀드렸지만 선생님은 점점 더 화를 내셨다. 격노한 선생님의 폭언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거짓으로라도 용서를 빌 수밖에 없었다. 선생님은 그것을 진정한 뉘우침으로 받아들이셨는지 아니면 그 정도면 선생님의 권위가 회복되었다고 생각하셨는지 땅거미가 질 무렵 나는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거짓으로 위기를 모면할 수밖에 없었던 그때의 모멸감은 그후로 부당하게 휘두르는 힘에 대한 피해의식과 진실이 거짓으로, 거짓이 진실로 쉽게 왜곡될 수 있는 생활에 대한 절망감으로 오래도록 나를 괴롭혔다.

 진실과 거짓이 종이 한장의 앞뒤와 같다지만, 시시비비가 정당하게 가려지는 투명하고 믿음직한 사회를 꿈꾸면서 이유없이 코가 길어지는 일은 절대로 없을 것이라는 말과 함께 아이를 꼭 껴안아주었다.<임지선 작곡가·제1회 안익태 작곡상 수상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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