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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후 반대파숙청 “절대권력”/김일성 출생서 권력장악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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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후 반대파숙청 “절대권력”/김일성 출생서 권력장악까지

입력
1994.07.1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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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서 10여년간 항일빨치산활동/「어버이수령」으로 44년동안 권좌에/혁명군사병서 출발… 「보천보전투」로 부각/45년 구소지원속 귀국… 이듬해 인민위원장 김일성북한주석은 1945년 남북분단이후 49년간 북한을 통치해온 북한의 최고권력자였다. 김일성은 북한에서 신에 가까운 존재이며 모든 국가이념의 중추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극심한 경제난에 시달리면서도 북한주민들에게 『우리식대로 잘 살고있다』는 허위의식을 심어줄 정도로 북한의 정신세계를 다잡고 있는 인물이다. 우리에게는 6·25전쟁의 전범이지만 북한주민에게는 불세출의 영웅인 김일성에 대한 평가는 두고두고 일반인과 학계의 관심대상이 될 것으로 보인다.

 김일성의 유년및 청년시절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주장이 있다. 북한에서 출판된 김일성관련서적들은 우상화 정책에 따라 그의 일대기를 과장과 미화로 채우고있다. 반면 우리측에서 소개됐던 과거는 대체로 비하와 인신공격적 내용으로 그려져있다. 그러나 양극단을 오가는 학계의 오랜 논쟁속에서 김일성의 과거는 다수의견과 소수의견으로 가닥을 잡아가고있다.

 북한에서 주석이나 노동당총비서등 공식직책보다는 「위대한 수령」 「어버이 수령」으로 통하는 김일성은 1912년4월15일 평양의 농가에서 김형직과 강반석부부의 3남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본명은 성주(또는 성주)였다. 북한은 그의 생가를 「만경대고향집」이라는 이름으로 성역화해 북한주민및 외국귀빈의 필수 방문지로 삼고있다.

 김일성은 1919년 가족이 압록강 건너편의 만주땅 임강으로 이사함에 따라 그곳의 중국계 소학교인 모아산소학교에 입학했다. 1921년 가족이 팔도구로 이사가면서 팔도구소학교 2학년에 편입했던 그는 평양근교인 외가로 돌아가 외조부 강돈욱이 교감으로 있던 창덕학교에 입학했다.

 1925년 김일성은 창덕학교를 졸업하지 못한 채 다시 만주로 건너갔다. 그의 전기는 이를 「광복의 천리길」로 미화하고있다. 북한은 김일성의 부친이 1924년 만주에서 일본경찰에 체포됐다가 탈주했다는 소식을 듣고 조국광복을 위해 혼자 만주로 떠났다고 주장한다. 그는 가족과 함께 무송으로 이주해 무송소학교를 마친 뒤 1926년 화성의숙이라는 한인학교에 입학했다. 김일성은 4∼5개월 뒤 다시 길임의 중국인학교인 육문중학으로 옮겼다. 이 즈음 부친 김형직이 사망했다.

 이후 김일성은 공산청년단체에 가입했으며 이 활동때문에 2학년때 학교를 중퇴했다. 김일성은 만20세이던 이때부터 항일유격대활동에 적극 가담했다. 그는 이후 41년 소련으로 도피할 때까지 약 10년간 만주일원에서 항일빨치산활동을 전개했다. 북한은 이 기간중의 활동을 집중 부각시키며 우상화의 토대로 활용하고있다. 북한은 『백두산의 정기를 타고나 천지조화를 다 알고 축지법을 쓸 줄 알며 모래로 쌀을 만들고 솔방울로 총알을 만드는 만고의 영웅』이라고 과장할 정도이다. 그러나 일부 학자들은 당시 김일성이 마적떼의 일원이었을 뿐 조작된 인물이라는 주장을 펴고있다. 이 가짜설은 현재 소수에 머물고있다.

 김일성은 22세때인 1934년 한인 주진이 창설한 중국공산당 산하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에 정착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북한측은 김일성이 처음에는 전사( 사병)였으나 계속 진급해 24세때 동북항일연군의 제1로군 제2군 제6사장(대대장급 장교)까지 올라갔다고 주장하고있다. 당시 동북항일연군의 간부는 대부분 중국인이었으나 전사중에는 한인이 많았기 때문에 중국인들은 한인들과의 협력에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었다.

 김일성은 장백 무송현지방에서 소규모 전투활동을 하다 1937년 북한이 자랑하는 「보천보전투」에 참여했다. 이 사건은 당시 국내신문에 크게 보도되는 등 김일성이라는 이름을 유명하게 만드는 계기가 됐다. 그러나 이 때의 김일성은 다른 사람이라는 주장도 있다.

 김일성은 1941년 일본의 공격이 거세지면서 소련으로 피신하다 소련국경수비대에 붙잡혔다. 당시 중국 제2로군 총사령인 주보중의 신원보증으로 석방된 그는 1943년 소련이 구성한 「88독립저격여단」의 1대대장(대위)이 됐다. 비슷한 시기 김일성은 만주에서 함께 빨치산활동을 했던 김정숙과 결혼했다. 42년 낳은 첫 아들이 지금의 김정일이다. 김정숙은 49년 평양에서 사산아를 낳다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다.

 1945년 해방과 함께 김일성은 소련군과 함께 북한으로 들어와 정권을 장악했다. 무명의 소련군장교였던 그가 정권을 잡은 것은 소련의 절대적인 지원과 그의 교묘한 권모술수 때문이었다는 것이 일반적인 분석이다. 소련당국은 45년10월14일 평양공설운동장에서 열린 소련해방군 환영군중대회에서 김일성을 「조선인민의 영웅」으로 소개했다. 그는 46년2월8일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 위원장에 지명되면서 확고한 정치적 입지를 다져나가기 시작했다.

 김일성은 45년12월 조선공산당북조선분국의 위원장 자리를 차지한 뒤 소련의 지원아래 서울의 조선공산당과 분리하는 작업을 은밀히 추진했다. 46년6월 조선공산당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한 김일성은 곧이어 노동당창당작업에 들어갔다. 두 달 뒤인 46년8월말 그는 중국에서 돌아온 연안파와 연합, 북조선노동당의 창당대회를 열고 노동당 부위원장을 차지했다. 김일성은 48년9월9일 수립된 북한정부의 초대수상에 취임했고 49년6월에는 남로당과 합친 조선노동당의 위원장에 올랐다. 이에 앞서 소련의 지원으로 48년2월 조선인민군을 창설한 김일성은 자신의 빨치산동료들을 요직에 배치, 군장악에도 성공했다.

 김일성은 50년6월25일 강력한 군사력과 소련의 지원에 대한 과신, 국제정세 오판등의 배경아래 적화통일을 위한 남침을 감행했다. 김일성은 6·25전후 권력을 장악하는 과정에서 조만식과 같은 민족주의자뿐 아니라 박헌영 김두봉 허가이등 자신에 협력했던 공산주의자들도 패전책임 종파주의 간첩등의 죄목으로 가차없이 제거했다. 50년12월 노동당 중앙위 제3차전원회의에서 김일성은 빨치산동료들을 비롯한 거의 모든 사람을 공격했다. 그는 이어 소련파의 거두인 허가이를 숙청하고 박헌영등 국내파를 미국을 위해 스파이활동을 했다는 등의 죄목으로 사형에 처했다.

 북한권력을 완전장악한 김일성은 세계에서 유례를 찾을 수 없는 유일숭배체제를 구축해갔다. 마치 종교와도 같은 김일성숭배는 주체사상이라는 독특한 이념체계와 함께 44년간의 절대권력을 유지시켰다.<정광철기자>

◎유가족 누가 있나/결혼 두차례… 모두 3남4녀/정일·평일외 신원 잘안알려져/현부주석인 김영주는 친동생

 8일 갑자기 사망한 김일성은 두차례 결혼으로 모두 3남4녀를 두고있다. 전처인 김정숙(1917년생·49년 사망)의 슬하에 김정일(52)과 김경희(48·여)당경공업부장, 김영숙(49·여)등 1남2녀가 있다. 이른바 「본가지」다. 이중 경희의 남편 장성택당청년사업부장은 3대혁명소조운동의 실질적책임자로 김정일의 권력부상 과정과 운명을 같이해온 핵심 실세이다. 김정숙과의 사이에는 김성일이란 아들이 하나 더 있었지만 8세때 익사한 것으로 알려지고있다.

 53년 혹은 63년(두가지 설) 김성애와 결혼한 김일성은 슬하에 김경진(42·여), 김평일전핀란드대사(40), 김영일(39), 김금순(38·여)등 2남2녀의 「곁가지」들을 두고있다. 이들중 김평일만이 잘 알려져있을 뿐 장녀 경진(또는 경숙)은 김광섭전체코대사의 부인이라는 것, 차남 영일은 88년께 유고·동독등에 체류했다는 것 이외에는 거의 동향이 알려져 있지 않다.

 김일성의 형제들로는 친동생인 김영주부주석(70)과 종제(백부 김형록의 아들)인 김창주부총리, 김봉주전직총위원장 등이 있다.

 그밖에 김일성의 친인척으로는 최고인민회의 의장 양형섭(김정숙의 동생 김신숙의 남편) 민주조선 책임주필 김정숙(숙부 김형권의 딸·91년5월 사망한 허담의 처)등이 있다.<홍윤오기자>

□김일성주석 연대기

▲1912·4·15 평남 대동군 고평면 남리 만경대에서 출생

▲23 만주 장백현 팔도구소학교 졸업

▲26 만주 화전현 화성의숙 수학

▲26 만주 길림 육문중학 중퇴, 재학중 공청 가입

▲30 김성주를 김일성으로 개명

▲31 중국공산당 입당

▲32 중국공산당 조선인부대 지대장

▲35 김일성으로 재개명

▲36 조국광복회 조직

▲40년말 소련으로 망명

▲45·9 소련점령군 비호하에 입북

▲45·10 「김일성장군환영」평양시군중대회에 등장

▲45·12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 책임비서

▲46·2 북조선 임시인민위원회 위원장

▲46·7 북조선 민주주의민족통일전선의장단 의장

▲46·8 북조선 노동당 부위원장

▲47·2 북조선 인민위원회 위원장

▲48·8 최고인민회의 제1기 대의원대회서 북조선노동당 부위원장

▲48·9 수상(제1차 내각)

▲49·6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위원장

▲50·6 군사위원회 위원장 

▲50·7 인민군 최고사령관

▲53·2 원수칭호

▲53·7 영웅칭호

▲61·9 노동당 중앙위원회 위원장 및 정치위원회 위원장

▲66·10 노동당 중앙위원회 총비서

▲70·11 노동당 총비서겸 정치위원

▲72·4 2중 영웅칭호

▲72·12 최고인민회의 제5기 대의원대회서 국가주석, 중앙인민위원회위원겸 국방위원회 위원장

▲77·11 최고인민회의 제6기 대의원대회서 국방위원회 위원장, 인민군 최고사령관(원수)

▲80·10 노동당 중앙위원회 정치국 상무위원, 총비서, 군사위원장

▲92·4 대원수칭호

▲94·7·8 사망

 <단, 인민군최고사령관은 91년12월에, 국방위원회위원장은 93년4월에 김정일에게 이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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